ADVERTISEMENT

[히든챔피언의 비밀]베어링만 100년 SKF, 이젠 로봇·AI가 만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SKF 예테보리 스마트 공장에서 로봇이 베어링을 만들고 있다. 각종 부품은 자율주행 로봇이 공정에 맞게 공급한다. [사진 SKF]

SKF 예테보리 스마트 공장에서 로봇이 베어링을 만들고 있다. 각종 부품은 자율주행 로봇이 공정에 맞게 공급한다. [사진 SKF]

지난달 1일 찾은 금속베어링 분야 세계 1위 기업 SKF의 스웨덴 예테보리 본사 옆엔 2017년 문을 연 새 공장이 있었다. 다양한 베어링을 혼류(混流) 생산(1개의 라인에서 여러 제품을 만드는 것)하지만 작업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 공정을 로봇과 인공지능(AI)이 수행하는 첨단 무인 스마트 공장이어서다.

진화 거듭하며 첨단화 세계 1위로 #기술 강소기업 ‘텐테’의 비결 #피아노용 등 연간 1000만개 생산 #정숙·내구성…명품 캐리어 바퀴도 #소재 개발 집중, 침대엔 관심 없어

2년 전까지 100명이 근무하던 공장이지만 지금은 20명의 모니터링 인력만 남아있다. 일자리가 줄더라도 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데 노조가 동의한 결과다. 스웨덴의 대표적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SKF는 100년 넘게 첨단을 추구하며 진화했다. 노사상생과 협력은 그 바탕이 됐다.

중앙일보는 창간 54주년을 맞아 독일·스웨덴·이스라엘의 ‘히든 챔피언’ 기업을 찾았다. 히든 챔피언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시장 점유율 1~3위를 기록하는 소재·부품·장비 ‘강소(强小)기업’이다.

‘히든 챔피언’을 찾은 건 이들 기업을 통해 한국 ‘소부장’ 산업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히든 챔피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랜 축적(蓄積)의 시간과 도전을 두려워 않는 혁신(革新)의 시간, 미래를 위해 협력한 화합(和合)과 상생의 생태계(生態系)를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스웨덴은 어떻게 ‘소부장’ 강자를 지키는가.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스웨덴은 어떻게 ‘소부장’ 강자를 지키는가.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지난 7월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핵심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면서 산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8월에는 안보상 수출심사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도 제외됐다.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던 한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세계 최고의 완제품을 만들지만 이른바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은 미국·일본·유럽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전문가는 한국의 ‘소부장’ 기업 모두가 무턱대고 유럽이나 이스라엘 기업 사례를 좇을 수 없지만 이들 사례에 대한 학습을 통해 국내 산업구조와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모든 ‘소부장’을 대체할 순 없다. 기업이 경쟁력을 가질만한 분야를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민간 위주 기업환경을 만들고 자본시장의 평가방식도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222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웨덴 회가내스 본사. 금속분말 분야 세계 1위 기업이지만, 여느 유럽 소도시 학교 같은 모습이다. [사진 회가내스]

222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웨덴 회가내스 본사. 금속분말 분야 세계 1위 기업이지만, 여느 유럽 소도시 학교 같은 모습이다. [사진 회가내스]

지난달 2일 스웨덴 서남부 소도시 회가내스에서 만난 한스 쇼더홀름 회가내스 수석부사장은 기자에게 손톱보다 작은 금속부품을 보여줬다. 금속분말(Metal Powder) 세계 1위 기업 회가내스는 최근 전통적인 소결(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워내는 것) 대신 3D 프린팅으로 금속부품을 만드는 ‘디지털 메탈(Digital Metal)’ 기술에 투자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회가내스는 금속을 가루로 만들어 가마에 구워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전까지 금속제품은 주조(녹여서 틀에 찍는 것)하거나 단조(고온에서 두들겨 성형하는 것)해 만들었는데, 같은 강도의 제품을 더 빨리, 싸게 만드는 ‘사고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히든 챔피언’에겐 축적(蓄積)의 시간이 있다. 1797년 설립된 회가내스는 석탄 채굴업으로 출발해 석탄을 고온으로 구워 굳히는 ‘가마’ 기술을 개발했다. 19세기엔 세라믹(도자기) 사업으로 확장했고 20세기 들어 세계 최대 금속분말 기업으로 성장했다.

3D 프린팅은 21세기 회가내스의 ‘가마’다. 금속분말이란 본질은 지키면서 혁신을 이뤄낸 셈이다. 랄프 칼스트룀 디지털 메탈 사업부 매니저는 “작고 복잡한 부품을 자동화된 공정에서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1일 독일 쾰른 외곽의 작은 마을 베어멜스키르헨에서도 축적의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텐테라는 회사 이름은 낯설지만, 독일 명품 캐리어 리모와를 이야기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텐테는 독일 명품 캐리어 브랜드 '리모와'에 바퀴를 공급한다. [사진 텐테]

텐테는 독일 명품 캐리어 브랜드 '리모와'에 바퀴를 공급한다. [사진 텐테]

텐테 역시 1923년 피아노용 바퀴 생산업체로 시작해 100년 가까이 바퀴 ‘한 우물’만 판 기업이다. 리모와용 휠 외에도 루프트한자 등 항공사의 기내 카트에서 11t 무게를 견디는 대형 바퀴까지 연간 1000만개 이상의 바퀴를 만든다.

의료·수술용 침대의 바퀴는 세계 시장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정밀·정숙을 요하고 내구성까지 갖춰야 해 쉽게 뛰어들 수 없는 분야다.

독일 바퀴 전문기업 텐테의 제품. 텐테는 전 세계 의료용 침대 바퀴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는 강소기업이다. 베어멜스키르헨(독일)=김영주 기자

독일 바퀴 전문기업 텐테의 제품. 텐테는 전 세계 의료용 침대 바퀴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는 강소기업이다. 베어멜스키르헨(독일)=김영주 기자

축적의 시간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불과 수십 년도 이어가기 힘든 한국의 부품·소재기업으로선 기적 같은 얘기다. 수많은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비밀은 ‘한 우물’을 파는 데 있다.

쇼더홀름 회가내스 수석부사장은 “사업 초기 수익도 나지 않았고 시장도 작았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집념으로 사업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경쟁력의 비밀은 금속분말을 만들고 배합해 구워내는 노하우를 다른 기업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회가내스의 지난해 매출액은 103억6000만 스웨덴크로나(약 1조3000억원). 영업이익률은 20%에 육박한다.

회가내스 공장 모습. 금속분말을 배합하고 가마에 구워내 싸고 질 좋은 소재를 만드는 노하우는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다. [사진 회가내스]

회가내스 공장 모습. 금속분말을 배합하고 가마에 구워내 싸고 질 좋은 소재를 만드는 노하우는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다. [사진 회가내스]

텐테 역시 매출액은 2억1800만 유로(약 2800억원)로 크지 않지만, 최근 5년간 평균 영업이익률은 8% 이상이다. 전 세계 30개국에 진출했고 해외 공장도 6군데나 운영 중이다. 토비아스 라밍거 글로벌 담당은 “1970년대 ‘해외로 나가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고 말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가 ‘소부장’ 육성을 위해 수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하지만 돈만 써서 될 일이 아니라 오랜 데이터와 경험이 축적돼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히든 챔피언 기업의 소재 포뮬러(배합 노하우)가 영업비밀이며, 수백만, 수천만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획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퀴 전문 기업 텐테의 랩센터는 70여년 간 만들어온 바퀴 전시와 함께 다양한 실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베어멜스키르헨(독일)=김영주 기자

바퀴 전문 기업 텐테의 랩센터는 70여년 간 만들어온 바퀴 전시와 함께 다양한 실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베어멜스키르헨(독일)=김영주 기자

회가내스는 금속분말 1위 기업이지만 부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 소재를 개발해 공급한다. 텐테는 의료용 침대 바퀴 1위 기업이지만 침대를 만들지 않는다. ‘납품 중소기업’이 아니라 ‘기술 강소기업’을 지향해서다.

텐테는 지난해 매출액의 8%에 달하는 1800만 유로(약 230억원)를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 라밍거 담당은 “고객사가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분석을 통해 고객사의 비밀까지 파악한다”며“이를 통해 완벽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게 텐테의 철학”이라고 했다.

특별취재팀=최준호·이동현·김영주·박민제·문희철 기자 offramp@joongang.co.kr

☞히든 챔피언=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1996년 펴낸 동명 저서에서 나온 용어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강소기업을 말한다. 지몬은 세계시장에서 1~3위 이내 제품을 가지고 있고 매출이 50억 유로(6조 5630억원) 이하이며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을 히든 챔피언으로 정의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