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춘재가 캐올린 고구마줄기에…경찰 33년 흑역사 낯뜨겁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영화 '살인의추억' 한 장면. 당시에는 과학수사가 전무해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사진 IS포토]

영화 '살인의추억' 한 장면. 당시에는 과학수사가 전무해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사진 IS포토]

처제 살인죄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무기수 이춘재(56)가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등을 자기가 저질렀다고 지난 2일 실토했다. 첫 살인 사건이 발생한 1986년 이후 33년 만이다. 유전자(DNA) 물증, 목격자 증언 및 최면 조사, 프로파일러(범죄심리 분석관)의 활약 덕분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이 확인되면서 '세상에 완전 범죄는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점은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정부든 경찰이든 내놓고 성과를 자랑할 수도 없고, 지켜보는 국민도 흔쾌히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기 어려운 게 현재의 분위기다. 범인이 이춘재로 확인됐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 14명을 더 살해한 이춘재에게 추가 처벌은 어렵다. 결국 경찰은 '공소권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테고 이 사건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범죄자에게는 지은 죄에 비례하는 단죄를 못 하고, 너무 늦은 정의로는 억울하게 숨진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2003년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로 만들어져 525만명이 봤지만, 화성 사건은 결코 흐뭇한 추억도 흥미의 대상도 아니다. 진범 이춘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경찰과 한국 사회의 치부가 들춰지고 있다.

1987년 1월 경기도 화성에서 5차 살인 사건 현장을 살피는 경찰. [연합뉴스]

1987년 1월 경기도 화성에서 5차 살인 사건 현장을 살피는 경찰. [연합뉴스]

화성 연쇄 살인 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 전단. [연합뉴스]

화성 연쇄 살인 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 전단. [연합뉴스]

시민 제보 2건이 사건 해결 촉매제 역할
 올 초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 미제사건전담팀이 그동안 오산경찰서(옛 화성경찰서)가 맡아오던 화성 사건을 넘겨받았다. 때마침 지난 4월과 7월에 잇따라 구체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경기 남부청 관계자는 "문신도 있고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는 내용의 구체적 제보였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전직 경찰관은 기자에게 "이춘재의 전처 이모씨가 경찰에 제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귀띔했다. 공교롭게도 이춘재는 지난 6월 법무부에 '수형 사실 비공개'를 신청한 것으로 드러나 배경에 의문을 낳고 있다. 이춘재는 청주에서 결혼한 뒤 아내가 가출하자 94년 처제(당시 20세)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서 25년째 수감 중이다. 경기 남부청 관계자는 "제보자가 직접 이춘재를 지목한 게 아니었다"며 부인했다. 그러면서 "제보자가 지목한 인물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 박모씨와 미국에 사는 한인이었다"고 반박했다.
 어쨌든 경찰은 두 건의 제보를 계기로 기결수들의 DNA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일선 경찰서가 화성 사건 현장에서 수거해 보관 중이던 여성 속옷과 담배꽁초·머리카락 등을 지난 7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DNA를 어렵사리 채취했다. 이어 대검찰청 수형자 DNA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8월 초 이춘재를 피의자로 특정할 수 있었다.
 경찰이 33년간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시민들의 끈질긴 제보가 사건 해결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셈이다. 경찰로서는 공을 내세우기 머쓱한 대목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경찰관들이 범인을 추측하고 있는 장면.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경찰관들이 범인을 추측하고 있는 장면.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세계일류 수사경찰'을 표방하고 있는 경찰청. 장세정 기자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세계일류 수사경찰'을 표방하고 있는 경찰청. 장세정 기자

속속 드러나는 경찰 무능과 부실 수사
 이춘재의 존재가 DNA로 포착된 이후 직간접 이해관계자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94년 이춘재의 처제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충북 청주 서부경찰서(현 흥덕경찰서) 김모(62) 전 형사의 발언이었다. 화성에서 연쇄 살인을 저지른 이춘재는 91년부터 화성과 청주를 오가며 굴삭기 기사로 일했고 청주의 골재 채취회사 경리였던 아내를 만나 91년 7월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을 낳았고 93년엔 주민등록을 청주로 옮겼다.
 하지만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가출하자 처제를 살해했다. 아내는 당시 경찰 조사에서 "남편에게 성도착증이 심하다"고 진술했지만, 경찰은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김 전 형사는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이춘재를 데리고 화성 본가를 갔더니 화성 쪽 경찰들이 찾아왔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화성 경찰관들에게 "청주로 오면 수사자료 등 필요한 것을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이후에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화성 쪽 경찰 해명은 좀 다르다. 이춘재의 신병 인도를 청주 쪽 경찰에 요청했지만, 처제 살인 사건에 집중하던 청주 쪽에서 "우리도 바쁘니 필요하면 직접 데리고 가라"고 하는 바람에 끝내 수사 공조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성 출신인 이춘재가 청주에서 유사한 살인 사건으로 검거됐는데도 이춘재의 화성 살인과의 연관성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이춘재가 빠져나갈 틈을 경찰이 만들어 준 셈이다.
 이춘재가 머무는 기간에 청주에서 5건의 유사한 살인 사건이 더 발생했지만, 경찰은 사건을 풀지 못했다. 이번에 이춘재의 자백이 있고 난 뒤에야 이춘재의 범행으로 보고 재수사 중이다. 이춘재를 대담한 연쇄 살인범으로 키운 것은 그의 잔혹성뿐 아니라 경찰의 수많은 실책도 작용했던 셈이다. 경찰이 뼈아프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경찰 출신으로 한국범죄학연구소에서 활동하는 김주한 연구위원과 박영수 학술고문. 장세정 기자

경찰 출신으로 한국범죄학연구소에서 활동하는 김주한 연구위원과 박영수 학술고문. 장세정 기자

'화성 그놈' 지목돼 무고한 남성 4명 자살
 화성 사건은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 말기였던 86~91년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김주한 한국범죄학연구소 연구위원은 "당시는 군 출신을 경찰에 대거 투입해 군사 훈련하듯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엔 과학수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폭행·고문 등 강압적 수사가 흔했고 죄 없는 남성들이 용의자로 몰려 억울하게 고통을 겪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화성 사건 당시 2만1280명이 수사대상에 올랐고 이들 중 3000여명이 조사를 받았다. 모두 4명의 남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끝내 극단적 선택을 했다.
 4, 5차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다가 끝내 자살한 김모(당시 46세)씨를 변호했던 김칠준 변호사는 "경찰은 지금이라도 과거 수사의 오점을 반성하고 누명을 쓴 국민 앞에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죄 없는 국민이 부당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학수사를 강화해야 하고, 12월 말에 폐기를 앞둔 DNA법을 속히 개정해 DNA 수집에 공백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에는 과학수사가 사실상 전무했다. 33년이 지난 요즘 경찰청은 과학수사를 유달리 강조한다. 장세정 기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에는 과학수사가 사실상 전무했다. 33년이 지난 요즘 경찰청은 과학수사를 유달리 강조한다. 장세정 기자

화이트칼라 계층에 사이코패스 많다
 이춘재의 존재가 확인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반사회적 성격 장애(ASPD)에 해당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어디 이춘재뿐일까 하는 점이다. 실제로 정치권에서 소시오패스 논란도 불거졌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진영 교수는 "호주에서 기업 최고경영자(CEO) 5명 중 1명이 사이코패스로 조사돼 죄수와 비율이 비슷했다"면서 "미국에서도 교수 261명 중 21%가 사이코패스 경향성을 띄었는데 전체 인구 중 사이코패스 비율(1%)보다 매우 높았다"고 소개했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를 직접 면담했던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조은경 교수(심리학)는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를 다룬 책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Snakes in suits)』를 인용하면서 "상대가 실수해야 내가 성공하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인·교수·기업가·종교인 등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ASPD 비율이 대체로 높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반사회적 성격 장애인들은 준법의식이 약하고 사소한 규범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누구나 이렇게 한다고 변명하며 윤리의식이 무뎌져 있다. 법을 어겼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법을 수시로 어기고 산다. 남의 권리에 둔감하고 자기 이익에 민감한 부류다. 조 교수는 "공감 능력이 없으며 남을 밟고 이용하고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ASPD의 범위는 아주 넓다"며 "법을 어겨도 교정이 가능하면 소시오패스, 죄의식도 없고 교정 가능성이 없으면 사이코패스로 분류된다"고 전했다.

조은경 동국대 교수는 외국 연구 결과 등을 근거로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반사회적 성격 장애가 많이 발견된다"고 소개했다. 그가 번역한 '진단명 사이코패스-우리 주변에 있는 이상 인격자'. 장세정 기자

조은경 동국대 교수는 외국 연구 결과 등을 근거로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반사회적 성격 장애가 많이 발견된다"고 소개했다. 그가 번역한 '진단명 사이코패스-우리 주변에 있는 이상 인격자'. 장세정 기자

 로버트 헤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저서『진단명 사이코패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상 인격자』를 번역한 조 교수는 "사기 등 화이트칼라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폐해가 훨씬 큰데도 살인 등 강력범보다 비난과 분노가 상대적으로 작다"며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남을 속이고 피해를 주는 화이트칼라 범죄가 사실은 더 나쁘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화이트칼라 범죄자는 계속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재판이 진행될수록 스토리가 자꾸 바뀌어 범죄를 밝혀내기가 더 어려운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