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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이대로 가면 ‘남자 박근혜’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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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문재인 대통령의 정체성이 허물어지고 있다. 조국을 지키려다 공정과 정의라는 진보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박근혜를 몰아낸 집권 명분이 소멸하고 있다.

헌법이 금지한 특수계급 된 조국 #‘특권 상징’ 지키려 공정·정의 포기? #민주주의 잃은 문재인 쓸쓸할 것 #조국 버려야 비극 막을 수 있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공언한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조국 일가에는 행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특혜가 집중됐다. 가족의 물질적 이익을 단기간에 극대화하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의 종착역은 공동체 전체의 파멸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특권과 반칙의 동의어가 된 조국을 고집한다. 그가 아니면 검찰 개혁이 안된다고 한다. 조국 딸의 입시비리가 문제인데, 조국은 놔두고 교육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이게 공정이고 정의인가.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특수계급의 창설’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조국 일가는 이 성문율을 어기고 귀족의 특혜를 누려 왔다. 민심은 폭발 직전인데 대통령은 ‘피의자 조국’을 정의를 관장하는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취임식 때 내건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산산조각 났다. 지금 이 나라 헌법의 수호자는 무대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임기 반환점을 눈앞에 두었지만 어떤 뚜렷한 성과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제와 민생이 가라앉았고, 외교와 안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지지율이 무너지지 않은 건 오직 선의에 대한 믿음 하나 때문이었다. 막스 웨버식의 신념윤리가 예외적으로 강한 인물이어서 도덕적 정치행위를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국의 위선을 옹호하는 불통의 대통령을 바라보는 진보의 내면 풍경은 우울하다. 생각을 달리하는 동지들을 ‘반역자’ ‘밀정’이라고 공격하는 광기에 합리주의자들은 둥우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내부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광장은 전체주의의 감옥일 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조롱당하는 문재인의 세계는 쓸쓸해질 것이다. 더 나쁜 야당과 보수가 있으니까 지지자들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비현실적이다. 문 대통령이 끝까지 조국을 사수하면 ‘남자 박근혜’가 되고,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2기’가 될 것이다.

자신이 내린 판단의 오류 가능성을 엄정하게 점검하는 것은 성숙한 정치지도자의 기본 자세다. 17세기의 회의주의자 데카르트는 마침내 자신의 감각까지 의심했다. 철학·물리학·수학의 천재는 눈앞의 현실세계가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신할 수 없어 번민했다. 이렇게 자신을 향한 지독한 회의 속에서 광신을 이겨낸 합리적 이성의 시대인 근대가 탄생했다. 자기확신으로 무장한 채 비판을 봉쇄하고 단죄하는 세력의 무도한 행태는 광신도의 마녀사냥이다.

조국의 친구인 진중권은 고백한다. “신뢰했던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됐으며, 존경했던 분들을 존경할 수 없게 되고, 의지했던 정당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이 되니 윤리적으로 완전히 패닉 상태다.” 그는 “진보가 거의 기득권이 돼버렸다는 느낌이 든다”고 참회했다.

진보의 붕괴다. 총체적 책임자는 문 대통령이다. 조국을 임명하면서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지금까지 낙마한 고위직은 대부분 명백한 위법 이전에 도덕적 하자가 문제였다. 대통령이 내 편을 보호하겠다고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니 나라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려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것 아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3년 전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가 불거졌을 때 힘이 센 그를 내치지 않았다.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져 정권이 몰락했다. 문 대통령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극렬 지지세력들은 살아 있는 권력 조국을 향해 칼을 겨눈 윤석열 검찰총장을 반란군 수괴로 몰아가고 있다. 민주주의보다는 전체주의에 더 가까운 장면이다. 전체주의에 맞섰던 칼 포퍼는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지옥을 만들 뿐이다”고 했다.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은 달랐다. 분열이 아닌 통합을 꿈꿨다. 박근혜에게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했고, 총리와 장관 상당수를 야당에 맡기는 대연정을 추진했다. 반대자의 애국심도 활용하겠다는 진정성이 있었다.

대통령은 국민 통합의 책무가 있다. 문 대통령은 조국을 사퇴시키고 취임사에서 약속한 대로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핏발선 광장의 분열이 끝나고 범부(凡夫)의 하루가 평온해진다. 칭기즈칸은 낮에는 전투하고 밤에는 불교·유교·기독교인 , 몽골 샤먼·티베트 점술가들을 끊임 없이 불러들여 함께 대화했다. 싸움 잘하는 유목민의 추장에서 13세기 세계대제국을 건설한 지도자가 된 비결은 종교적 관용과 소통이었다.

문 대통령은 북한과도 대화의 문을 열고 포용한 지도자다. 야당·보수와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 실력이 부족하면 온 세상의 유능한 인재를 모조리 끌어다 써야 한다. 익숙했던 진영의 추장 직에서 내려와야 몰락의 비극을 막고 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