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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투자로 한탕…‘통곡의 벽’ 임상3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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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국내 주요 바이오 기업들의 잇따른 임상 실패로 K바이오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왼쪽부터 문은상 신라젠 대표, 김선영 헬릭스미스 대표, 이우석 코오롱생명과학 대표. [뉴스1·뉴시스]

국내 주요 바이오 기업들의 잇따른 임상 실패로 K바이오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왼쪽부터 문은상 신라젠 대표, 김선영 헬릭스미스 대표, 이우석 코오롱생명과학 대표. [뉴스1·뉴시스]

생명공학 박사 출신인 박지연(가명)씨. 전문 투자사에서 유망한 바이오기업을 골라 투자하는 게 주요 업무다. 하지만 요즘엔 투자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최근 살펴본 곳도 그랬다. ‘치매 치료 관련 연구를 한다’고 해 관심을 가졌지만 박씨가 받은 자료엔 ▶(줄기세포) 배양방법의 차별성 ▶세포 공여자 정보 ▶배양을 통해 얻은 성장인자의 특이성 같은 꼭 갖춰야 할 내용은 턱없이 부실했다. 대신 언론 보도사례와 비공식 임상 사진만 그득했다. 해당 기업과 면담 자리에선 “‘쉘(Shell·매출 등이 제대로 없는 껍데기 상장사)’만 붙이면(우회 상장하면) 주가가 날아갈(폭등할)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

K바이오 3상 못넘는 이유 5가지 #글로벌사 1000명씩 투입하는데 #한국 몇십명뿐 경험·역량 태부족 #1·2상 연구 부실, 최종단계 좌초

한국바이오산업(이하 K바이오)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코오롱의 인보사, 신라젠의 펙사벡, 헬릭스미스의 엔젠시스 등이 모두 3상의 벽을 넘지 못했다. 미국 식품의약처(FDA) 임상3상의 평균 성공률은 58.1%지만, K바이오의 3상 성공률은 여기에 한참 못 미친다. K바이오 업계가 임상3상에 유독 취약한 이유를 집중 분석했다.

① 직원 28명, 임상3상 관리능력 있나=임상 3상에는 사·내외를 합쳐 보통 100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된다. 하지만 세계 최초 골관절염 유전자 치료제로 기대를 모은 ‘인보사’의 개발사인 코오롱 티슈진의 전체 직원 수는 64명, 평균 근속연수는 2.1년이다.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바이오사업부 직원은 28명 뿐(2019년 반기보고서 기준)이다.

물론, 규모가 전부는 아니다. 해외에선 소규모 바이오 기업이 임상(CRO)과 생산(CMO), 판매(CSO) 등 전문 업체를 활용해 신약을 개발한다. 익명을 원한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임상3상과 신약 허가에는 방대한 현장 관리와 데이터 분석, 서류 작성 등 대략 1000명 가까운 인원이 참여한다”며 “하지만 K바이오 업체 중에는 그 정도 대규모 연구를 이끌어 갈 경험과 역량을 갖춘 곳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 FDA의 임상 단계별 성공률.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미국 FDA의 임상 단계별 성공률.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② ‘온리 파이프라인’의 한계=신라젠의 펙사벡이나 코오롱의 인보사, 헬릭스미스의 엔젠시스는 모두 이들 기업이 가진 사실상 유일한 파이프 라인이다. 이 물질 하나로 증시 상장까지 이뤄냈다. 초기 임상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대기업 계열 제약사 관계자는 “항암제를 예로 들면, 최근 글로벌 제약사는 후기 임상에서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임상1상에서 다양한 병증의 환자를 모집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임상1·2·3상을 거치면서 적응증을 좁혀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K바이오 기업들은 적은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 또 더 빠르게 다음 단계 임상에 진입하기 위해 특정 질환만을 목표로 좁게 임상을 진행한다. 이처럼 초기 임상이 약하니, 후기 임상 단계로 갈수록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면 허둥대기 일쑤다.

③ FDA는 ‘임상 성공’ 표현 안 써=K바이오 기업들이 미 FDA의 임상 착수에 너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문제다. 미 FDA는 업체가 낸 ‘임상시험계획(IND)’ 등이 별 문제가 없으면 승인해준다. 다음 단계의 임상을 진행할지 결정하는 건 본질적으로 FDA가 아니라 해당 기업이다. 같은 맥락에서 FDA는 ‘임상○상 성공’ 등의 표현도 쓰지 않는다. 대신 임상 단계별로 ‘다음 연구가 시작될 것(Studies may begin…)’이란 식의 표현을 사용한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 파마·Big Pharma)들도 ‘임상에 성공했다’란 말 대신 ‘긍정적인 임상 결과를 냈다’는 식으로 소개한다.

매출 53억인데 시총 3조 ‘투기판’

④바이오 기업의 주먹구구식 가치산정=대부분의 K바이오는 매출은 없고, 매년 수백억 원씩 적자를 내고 있다. 한 예로 ‘임상 오염 사태’ 이전인 지난달 23일 헬릭스미스의 시가총액은 3조6543억원에 달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52억8000만원. 당기순손실은 305억원이었다. 코오롱 티슈진이나 신라젠 역시 시가총액이 한때 4조~5조원을 넘나들었다. 국내 제약업계 1위인 유한양행의 시가총액은 2조8912억원(2일 종가 기준)이다. 지난해 매출은 1조5188억원, 583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폭탄 돌리기’식 투자 관행도 문제다. 최근 유튜브 등에는 ‘○○○ 단타 놀이…약 30% 수익실현’ 등의 자극적인 게시물까지 등장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상임부회장은 “투기성 자금이 몰리는 건 산업이 성숙해지면 해결될 일”이라면서도 “이제 ‘임상한다’는 소문에 (투자자가) 우르르 몰리고 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⑤ ‘신약=상업적 성공’ 아냐=임상을 마치고 FDA의 신약 시판허가를 받기만 하면 대박이 날까. 정답은 ‘모른다’이다.

FDA가 한해 판매허가를 내주는 신약은 35종(2009~2013년 기준) 정도다. 대박도 물론 있다. 면역항암제인 옵디보(2014년 허가)는 올해 미국에서만 36억6000만 달러(약 4조4100억원)어치가 팔릴 전망이다. 그러나 모든 신약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다. 2003년 LG화학이 미국 FDA의 판매 허가를 받아 출시한 만성 호흡기 질환용 항균제인 ‘팩티브’의 지난해 매출은 25억8000여 만원(추정치)에 그쳤다. 출시 당시 ‘세계적 신약’이란 찬사를 받았던 약이다. 빅 파마인 사노피의 부정맥 치료제 ‘멀택(2009년 출시)’도 ‘연 매출이 30억 유로(약 3조9597억원)에 달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실제 성적은 기대에 훨씬 못미쳤다.

판교=이수기·김정민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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