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건강한 가족] 어질러진 공간도 스트레스 원인, 말끔히 치우다 보면 기분 전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4면

정리·정돈과 정신 건강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정신 건강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이때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 정리·정돈 상태다. 평소와 달리 주변을 치우지 않거나 정리에 집착하는 행동은 각각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을 대변한다. 정리·정돈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강력하다. 정신 건강의 날(10월 10일)을 맞아 정리·정돈과 정신 건강의 연결 고리를 짚어봤다.

우울증 심하면 정리·정돈 손 놓아 #청결 집착은 자폐증 신호일 수도 #스스로 치워야 정신 건강에 좋아

같은 공간에 있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각각 다르다. 정리가 잘된 곳이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소 어지럽혀진 공간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정리·정돈 수준은 개인의 성향과 경험, 부모의 양육 방식, 교육 등 다양한 요인에 좌우된다”며 “의식적으로 시간과 노동력을 투자한다는 점에서 정리·정돈은 그 사람의 성격과 심리 상태를 가장 잘 투영하는 행동 중 하나”라고 말했다.

성격, 심리 상태 가장 잘 투영된 행동 

직장인 김예림(31·서울시 영등포구)씨는 주말마다 평일에 하지 못한 집안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한다. 널브러져 있는 화장품을 정리하고 쌓아둔 옷들을 구분해 빨래한다. 한번은 집 안 곳곳에 놓여 있던 컵 8개를 한번에 치운 적도 있다. 학창 시절에는 바로바로 처리하던 택배도 지금은 주말에 한꺼번에 정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김씨는 “퇴근 후 더러워진 집을 보면서 스트레스 받아도 정리·정돈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 선뜻 나서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리·정돈 수준은 자신의 건강 상태나 가치관 등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일상생활을 방해할 만큼 나쁜 쪽으로 진행된다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울증이다. 우울한 감정은 무기력감과 의욕 저하를 동반한다.

정리·정돈에 서서히 손을 놓다가 심한 경우 며칠을 씻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김 교수는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다고 모두 우울증은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종전에 우울증을 경험한 환자는 다른 증상 없이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재발·악화의 위험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정리·정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자폐스펙트럼장애(자폐증)나 강박 장애의 신호일 수 있다. 자폐증은 대부분 선천적으로 발병하는데 이 경우 아이가 단추 채우기, 정리·정돈 등 의미 없는 행동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박 장애는 불안 장애의 일종으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특정 사고나 청결·정리 등의 행동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성준 교수는 “예컨대 화장실을 청소하다 물이 몸에 튀면 샤워를 하고 물방울을 닦으려 다시 화장실 청소를 할 정도라면 강박 장애”라며 “주변을 치우고 대칭을 맞추는 것이 스스로 편하고 즐겁게 느껴지면 강박적 성격으로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지만 과하게 몰입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정신 건강을 돕는 ‘도구’로서 정리·정돈의 가치도 재조명되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질서하고 복잡한 공간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의 집을 ‘복잡하다’ ‘어수선하다’고 느끼는 주부는 ‘편안하다’ ‘휴식을 준다’고 생각하는 주부보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온종일 높았다(성격과 사회 심리학회지, 2010).

정리가 잘 안 된 주방에서는 정리가 잘된 주방에서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쿠키 등 단 음식을 두 배 많이 먹는다는 연구결과(행동과 환경, 2016)도 있다. 김 교수는 “정리가 안 된 환경은 통제가 안 되고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며 “이로 인해 뇌가 불필요한 긴장과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트레스를 받고 인지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어수선한 주방에서 단 음식 더 찾아 

정리·정돈은 결과만이 아닌 실천하는 것 자체로도 정신 건강에 긍정적이다. 고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철현 교수는 “지저분한 것을 치우고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물건을 정리하면서 복잡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성준 교수는 “기분 변화를 위해 사소하더라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지속해서 실천하는 것이 도움된다”며 “시간·공간의 제약이 적은 정리·정돈은 이런 ‘숙달감’을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활동”이라고 덧붙였다.

정리·정돈의 정신 건강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자신의 의지로 정리·정돈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타인의 강요로 인해 정리·정돈을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면 자신을 옭아매게 돼 오히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조철현 교수는 “가족 간에도 각자의 정리·정돈 수준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며 “공동·개인 공간을 분리해 관리하는 등 절충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 정리·정돈을 시작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좋다. 강북삼성병원 조성준 교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일종의 애착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인데 이는 물건을 집는 것만으로도 강화될 수 있다”며 “정리·정돈의 의지가 있을 땐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판단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정돈 시작은 이렇게

가장 먼저 생각을 정리한다
정리·정돈은 많은 물건을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다. 물건을 편리하게 쓰기 위한 정돈에 앞서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물건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부터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생활방식·직업·가치관의 변화에 맞춰 ‘현재’ 쓰는 물건인지를 기준으로 삼아 필요성을 판단해 본다.

디테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크기에 맞게 책을 꽂고 옷·수건을 예쁘게 접는 것이 정리가 아니다. 사소한 데 너무 많이 신경을 쓰면 쉽게 지쳐서 정리·정돈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크기가 큰 가구 등을 배치하고 그다음 세부적으로 물건을 정돈해 나가는 게 좋다.

집에 있는 물건을 최대한 활용한다
정리·정돈을 위해 가구·수납 용품을 새로 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결국 버려야 할 물건을 하나 더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일 상자나 쇼핑백을 꾸며 옷·장난감을 넣고 페트병·우유갑을 이용해 화장품·신발 수납장을 만들어 보자. 쓰레기가 줄고 버릴 때도 부담이 없다.

페트병으로 만든 신발장.

페트병으로 만든 신발장.

초콜릿 통을 활용한 귀걸이 보관함.

초콜릿 통을 활용한 귀걸이 보관함.


방보다 물건을 기준으로 정리한다 
정리·정돈은 안방·거실 등 공간별로 하는 것보다 물건을 기준으로 삼는 게 좋다. 손톱깎이·약 같은 공동 물건을 한데 모아 거실에 두고 화장품·장난감 같은 개인 물건은 각각 안방·아이 방에 두는 식이다. 찾기도 쉬울뿐더러 정리된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도움말=정희숙 똑똑한 정리 대표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