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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저녁이 있는 삶’ 좇는 요즘 직장인들

중앙일보

입력

작년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독서·스포츠·음악 등 취미 활동 활발
‘인맥 형성’에 도움 되는 모임에 선택적 참여… 깊은 관계 형성 어려워

현장취재 #우리는 퇴근 후 술잔 대신 라켓 잡는다

서울 낙원동 낙원악기상가 합주실에 모인 직장인들이 퇴근 후 취미활동으로 기타 연주와 보컬 연습을 하고 있다. / 사진:조상희

서울 낙원동 낙원악기상가 합주실에 모인 직장인들이 퇴근 후 취미활동으로 기타 연주와 보컬 연습을 하고 있다. / 사진:조상희

9월 6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 근무를 마친 직장인들이 빌딩 숲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몇몇씩 무리를 지은 이들은 ‘1차’를 하기 위해 술집으로 향했다. 반면 ‘방앗간’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광화문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이들도 있었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임에도 어둠이 깔리도록 세종문화회관 뒤편 술집들은 크게 붐비는 것 같진 않았다. 이 동네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여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 한번 봐. 길이 한산하잖아. 예전 같으면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들에게 떠밀렸을 텐데 요즘은 안 그래.”

주 52시간 근무제 등으로 노동시간 패턴에 큰 변화가 일었다. 직장인들, 특히 2030 젊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술보다 취미생활’이 대세로 자리하고 있다. 직장인들의 이른 퇴근으로 요가·필라테스·헬스클럽 등은 초저녁에도 사람들로 붐빈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함께 도입된 유연근무제 영향으로 점심시간도 쉬는 시간이 아닌 프라임 타임으로 바뀌었다. 샌드위치나 김밥으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것이다.

서울 대치동 한 헬스클럽 관계자의 말이다. “예전에는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에 회원들이 많이 찾았는데 요즘은 점심시간에도 운동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능률이 오르지 않는 오후 시간에 헬스클럽에 와서 러닝머신에 오르는 이들도 제법 된다.”

지난해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지 1년여가 흘렀다. 근로시간이 단축되면서 젊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여가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공부·운동·악기 등 개인 취향과 취미에 따라 각종 동아리도 생기고 있다. 말 그대로 ‘저녁이 있는 삶’이다.

2030을 중심으로 젊은 직장인들의 퇴근 후 여가활동 증가는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하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여가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17.1%에 불과했다. 주 52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들의 응답 비율(26.9%)보다 10% 포인트 가까이 낮은 수치다. 마케팅 조사업체 SM C&C가 자체 설문조사 플랫폼을 이용해 올해 3월 29일 하루 동안 전국의 만 20~59세 직장인 1603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독후감 쓰는 박씨, 암벽 타는 강씨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맑은클라임’을 찾은 직장인들이 암벽등반을 즐기고 있다. / 사진:최근우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맑은클라임’을 찾은 직장인들이 암벽등반을 즐기고 있다. / 사진:최근우

대기업에 다니는 박상영(32·가명)씨는 최근 일본 탐구를 위한 독서 모임에 가입했다. 한·일 갈등의 원인을 보다 깊게 이해하고 싶은 욕심에서다. 마침 일본에서 문헌학을 전공한 대학교수가 모임의 장(長)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박씨는 결심을 굳혔다.

동아리 성격의 모임이지만 운영 규정은 엄격하다. 모임 전날 자정까지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다음 날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 9월 6일 금요일 밤 11시, 마감 한 시간을 앞두고 모임의 총무가 마감 시간을 ‘단체 카톡방’에 연신 공지한다. 퇴근 후 동료들과의 술자리도 마다하고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간 박씨는 저녁도 거른 채 독후감 작성에 매달렸다. 박씨가 모임 홈페이지에 독후감을 올린 시간은 11시 59분, 1분을 남기고 간신히 마감 시간을 통과한 것이다.

9월 10일 화요일 오후 7시30분, 서울 은평구의 한 실내 인공암벽장.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8시 단체강습에 등록한 직장인들이다. 15명을 정원으로 한 강습반 두 개가 금세 다 찼다.

이곳을 운영하는 한대욱(40) 센터장은 “지난해 주 52시간 근로제가 실시된 이후 직장인 회원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1월 한 센터장과 인연을 맺은 강만석(37)씨는 “암벽에 올라 땀 한번 쫙 흘리고 나면 기분 자체가 달라진다”며 “이곳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서울 시내 다른 암벽장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며 웃었다.

SM C&C 조사에서 주목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여가가 늘어난 직장인들은 여러 형태의 여가활동 가운데 ‘모임 활동’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혼자서 취미활동을 하기보다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과 공유하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례로 독서 모임을 주선하는 스타트업(신생 창업기업) ‘트레바리’의 올해 1~4월 시즌 등록 회원 수는 4660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약 86% 늘어났다. 특히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지난해 5~8월 시즌 당시 등록 회원 수는 단숨에 1000명 이상 증가했다.

수평적 관계 바탕으로 한 ‘살롱 모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자전거 경주 대회에 출전한 오용석씨(왼쪽). / 사진:오용석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자전거 경주 대회에 출전한 오용석씨(왼쪽). / 사진:오용석

박상영씨 역시 트레바리를 통해서 독서 모임에 가입한 경우다. 4개월 단위 회비는 29만원으로 부담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런데도 정원 15명은 꽉 찼다. 어쩌다 결원이 생기면 이내 신입 회원이 들어올 정도로 모임은 인기가 높다.

박씨처럼 성향과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과 여가를 공유하려는 현상을 두고 “한국에도 살롱(salon) 문화가 본격 상륙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살롱은 프랑스어로 ‘사교 집회’, ‘응접실’ 등을 뜻한다. 18~19세기 프랑스 살롱은 성별과 신분을 초월해 대화가 이뤄지는 토론장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트레바리에서 주선한 독서 모임에서는 나이·학력·직업 등을 일절 밝히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한다. 호칭도 나이나 직책을 떠나 ‘○○님’으로 통일한다.

이렇듯 주 52시간 근무제가 젊은 직장인들 특유의 관계 맺기 문화와 어우러지며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 내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올해까지는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에게 한정되지만, 내년부터는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적용된다. 살롱 모임이 더 활성화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전날 밤 간신히 독후감을 제출한 박상영씨가 가입한 모임은 9월 7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트레바리 압구정 아지트’에서 이뤄졌다. 하필 13호 태풍 ‘링링’이 서울을 강타할 것이라 예보된 시간이었다. 유리창을 짓누르는 풍압(風壓)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런데도 약속 시각이 되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된 자리가 비좁은 탓에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는 사람도 있었다.

고양시 일산에 사는 김효진(29·가명)씨도 이런 즐거움 때문에 토요일 오후 태풍을 뚫고 서울까지 나오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회사에서 최근 일본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는 김씨는 “친한 친구들과도 다루기 힘든 이슈를 낯선 이들과 나누는 즐거움이 크다”며 “모임 후 뒤풀이에서는 더 솔직담백한 고민도 공유할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모임을 주선하는 서비스 공급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트레바리는 스스로 “더 나은 우리를 위한 독서모임 기반 커뮤니티 서비스”라고 소개한다. 트레바리 관계자는 “요즘 젊은 직장인 중 상당수는 ‘혼자보다 함께’를 선호하는 것 같다”며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정기 모임은 개인의 삶을 보다 주체적이고 합리적이며 개방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추석이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진짜 가을’이 시작되면서 저녁나절 서울의 대표적 쉼터인 한강공원에는 젊은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가벼운 산책과 자전거 등을 즐기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에 따르면 올해 1~5월 한강공원 일반 이용객은 1123만 명으로 추산된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2700만 명에 육박한다. 서울시민 한 사람이 평균 3회 가까이 방문한 셈이다.

전시대행사 ‘WEPM’을 운영하는 주영상(37)씨는 일주일에 한 번쯤 직원들과 함께 반포 한강공원을 찾는다. 주씨의 회사는 300인 사업장이 아니기에 주 52시간 근무제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주씨는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배드민턴을 한다. “다 같이 모여서 바람 한번 가르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는 주씨는 “겨울이 오기 전에 실내에서 다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땀 흘리는 이유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칼퇴근’이 정착되고 있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한 여성이 사무실에서 나가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칼퇴근’이 정착되고 있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한 여성이 사무실에서 나가고 있다.

유튜브 전용 동영상 제작 업체에 다니는 이효중(35)씨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동호회에 관심이 커졌다. 예전에는 야근 아니면 퇴근 후 한잔이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이씨는 얼마 전부터 절친한 선배의 권유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즐기는 테니스는 이씨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줬다.

대학 시절 야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이씨는 “야구처럼 복잡한 운동을 하긴 어렵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가볍게 라켓을 휘두른다”면서 “아무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에 덜 지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독일계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권모(27, 여)씨는 요즘 볼링에 푹 빠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서 회식 후 어쩌다 한번이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일주일에 서너 번 볼링장에 간다. “작년에는 동네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만 하고 거의 못 나갔는데 올해 들어서는 일주일에 서너 번 볼링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며 “추석 연휴 때도 회사 동료 몇 사람과 볼링장에서 공 한번 굴렸다”며 웃었다.

권씨처럼 스포츠를 여가로 즐기는 이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즐긴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 교수는 1973년 발표한 논문 ‘약한 유대의 강한 힘(The Strengths of Weak Ties)’에서 이런 형태의 모임을 예고했다.

강한 유대 관계를 가진 사람보다 약한 유대 관계를 지닌 사람에게서 더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게 논문의 요지다. 미국 보스턴 근교의 뉴턴 거주자 282명을 대상으로 구직 경로를 조사한 결과, 70%는 친밀하지 않은 약한 유대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라노베터 교수의 메시지는 이후 ‘얇더라도 넓은 인맥 구축’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활용됐다.

반면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활발하게 결성되는 모임에서 사회적 배경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학벌이나 계층 등 사회적 배경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만나기에 십상이라는 것이다. 심 교수는 이어 “젊은 직장인들은 회사 밖에서까지 피곤한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안전한 모임, 다시 말해 내게 도움이 되는 모임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김난도 서울대(소비자학과) 교수도 저서 [트렌드코리아 2018]에서 이런 경향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관계에도 가성비의 원칙을 적용하려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작용하고 있다. 이들에게 관계의 본질은 깊으냐 얇으냐 심도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애착·소통의 필요를 누가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되고 있다.”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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