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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때 받은 아버지의 레고 선물, 새 인생 열어주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상원의 소소리더십(51)

한 사람의 인생은 오랜 시간 노력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아주 우연한 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기회로 바뀌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브릭아티스트 중 하나인 진 케이(본명 김학진. 45세) 작가도 그렇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다 준 선물이 한창 게임 기획자로 바쁘게 살던 그를 전업 브릭아티스트로 변신시켜 주었다고 한다.

작품명 ‘해리하다(about dream : 잠들어 꿈에 빠져들다)’ 앞에 선 브릭아티스트 진케이. 완성 작품은 ‘브릭캠퍼스’에 전시중. [사진 진케이]

작품명 ‘해리하다(about dream : 잠들어 꿈에 빠져들다)’ 앞에 선 브릭아티스트 진케이. 완성 작품은 ‘브릭캠퍼스’에 전시중. [사진 진케이]

작품명 '해리하다(about dream : 잠들어 꿈에 빠져들다)'. [사진 브릭캠퍼스]

작품명 '해리하다(about dream : 잠들어 꿈에 빠져들다)'. [사진 브릭캠퍼스]

브릭아티스트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달라.
레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죠? 레고도 벽돌 모양 재료를 끼우고 쌓아서 만드는 완구를 뜻하는 브릭(brick) 브랜드 중 하나에요. 브릭으로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를 브릭아티스트라고 하죠. 명함에 적혀 있는 ‘Legotive, Brickable!’이라는 문구도 제가 만들었는데, 레고로 생각하고 브릭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에요.
레고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였나.
건축 관련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중동에서 돌아오시면서 레고를 사다 주셨어요. 1977년에 출시된 모델명 No. 400 ‘유니버설 빌딩세트’. 1980년, 제가 다섯 살 때였죠. 한참 동안 매일매일 갖고 놀았어요. 처음에는 설명서대로 만들고. 나중에는 나름대로 자유롭게 창작도 하고요.
다섯 살 때였는데 어떻게 모델명까지 구체적으로 기억하나.
2002년쯤에 갑자기 기억이 나서 찾아본 거예요. 상자 그림이 어렴풋하게 떠올라서 1980년 즈음 레고 모델들을 뒤져봤지요. 세계에 딱 두 개 판매가 되고 있더군요. 상태가 더 좋은 거로 제가 하나 사서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귀한 보물과도 같은 것이죠.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생애 첫 레고. 성인이 되어 세계에 두 개밖에 없는 제품을 찾아 직접 사서 소장하고 있다고. [사진 진케이]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생애 첫 레고. 성인이 되어 세계에 두 개밖에 없는 제품을 찾아 직접 사서 소장하고 있다고. [사진 진케이]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는데 건축 일을 하신 아버지, 선물 받은 빌딩세트 등의 영향인가.
그렇겠죠. 레고로 빌딩을 짓고 놀면서 집 짓는 것, 무언가 만드는 것에 관심이 커진 것 같아요. 제가 가끔 아이들과 브릭을 하기도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주로 아파트에 살아서 그런지 집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을 잘 못 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생각한 대로 그리고 만들고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말이죠.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레고에 대한 관심을 키워오고 직업으로 택한 것인가.
브릭아티스트나 마니아들에게 소위 ‘암흑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을 다니면서 관심이 떨어져 잊고 살던 시기죠. 저에게도 암흑기가 있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 취직하거나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IMF 직후라 쉽지 않았어요. 직장을 알아보다가 게임회사에 기획자로 취직했습니다. 건축물을 만든다는 것과 게임을 만든다는 것에서 묘하게 공통점을 느끼기도 했고요.
대학에서 건축공부 하던 시절 모델링 프로젝트에 레고로 만든 건축물을 제출했다. [사진 진케이]

대학에서 건축공부 하던 시절 모델링 프로젝트에 레고로 만든 건축물을 제출했다. [사진 진케이]

막연한 추측이지만 직장생활이 잘 안 맞을 것도 같은데.
처음 10년 정도는 재미있게 아주 잘했어요. 자동차 온라인게임을 만들었는데 꽤 잘 돼서 유료화에도 성공하고 해외판권 판매도 하고요. 스카우트 제안도 받아 꽤 알려진 회사로 이직도 하고요. 10년 넘게 정신없이 재미있게 일하고 좋은 결과도 많이 만들었죠. 그러다 게임 환경이 급격히 모바일 중심으로 바뀌는데 재미도 없고 잘 안 맞았어요. 진지하게 고민을 했죠. ‘지금 하고 있는 게임 개발 일을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거란 답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어요.
브릭아티스트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의 계기가 있었나.
취직해서 첫 월급의 반을 투자해서 사고 싶던 레고 시리즈를 샀었죠. 당시 인기를 끌던 스타워즈 시리즈였는데 처음으로 해외에서 어렵게 샀어요. 직장생활 틈틈이 취미로 즐기다가 작품 창작의 단계로 넘어갔죠. 작품을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리고는 했는데 2014년 봄에 예술의 전당에서 준비 중인 ‘스팀펑크’(steampunk: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기술이 발전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SF 대중문화의 한 장르) 전시회에서 출품 제안이 왔어요. '코끼리'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출품이 인생의 방향전환에 대한 좋은 힌트가 됐던 것 같아요.
놀이에서 진정한 창작 단계로 넘어가던 시기의 두 작품. 멸종 위기의 코뿔소의 충격적인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코뿔소(위)'. 예술에 전당에 출품한 작품 '코끼리'.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헌정이자 스팀펑크로의 재해석 작품(아래). [사진 진케이]

놀이에서 진정한 창작 단계로 넘어가던 시기의 두 작품. 멸종 위기의 코뿔소의 충격적인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코뿔소(위)'. 예술에 전당에 출품한 작품 '코끼리'.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헌정이자 스팀펑크로의 재해석 작품(아래). [사진 진케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행동에 옮겼나.
아내와 상의해서 블록방을 열었어요. 한쪽에 작업공간을 만들어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같이 운영했죠. 잘 됐습니다. 레고에 대해서 잘 아니까 차별화된 블록방을 만들 수 있었어요. 애들은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갖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요. 거의 모든 블록방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작업 책상만 쭉 놓았는데, 저희는 책상을 줄이고 노는 공간을 넓혔어요. 제가 작품 만드는 걸 보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부모들이 창작 수업을 열어달라고 요청도 했고요. 곧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드디어 전업 선언을 한 것인가.
네. 동호회 사람들에게 전업 레고아티스트가 되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사람들이 안 믿었죠. 오히려 아내가 도와주겠다고 지원을 많이 해 줬어요. 갑자기 사고를 친 것이 아니고 틈틈이 생각을 공유하고 계획을 같이 세웠거든요. 다음 달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전업 레고아티스트가 된 것이죠.
5년 정도 전업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데 주요 수입원과 금액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나.
평소에 만들어 둔 작품 판매도 하고, 기업이나 개인들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기도 합니다. 해외로부터 주문을 받기도 하고, 이벤트 참가도 하고 지원도 받고요. 현재 작업실을 제공하고 있는 브릭캠퍼스로부터도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작품료는 작게는 몇백만 원에서 많게는 몇천만 원까지 다양합니다. 작업 기간, 컨셉, 크기 등등에 따라 달라지죠.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브릭캠퍼스를 통해서 신형 자동차를 실물 크기로 제작해 줄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는데, 제작기간 6개월에 2억 원 견적이 나왔어요. 비용 때문이 아니라 제작기간 때문에 진행이 안 됐죠. 설계와 브릭 주문만도 3개월이 걸리거든요.
듣기, 소통, 존중의 의미를 담아 제작한 작품 '귀'. 싱가포르에 판매한 작품. [사진 진케이]

듣기, 소통, 존중의 의미를 담아 제작한 작품 '귀'. 싱가포르에 판매한 작품. [사진 진케이]

배우면 누구나 브릭아티스트가 될 수 있나.
미술이나 음악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취미나 아마추어 아티스트 정도의 수준은 누구나 배우면 가능합니다. 다만 전업 아티스트 등 어느 정도 이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배우는 것에 열정, 타고난 재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다만, 취미든 직업이든 브릭아트를 배우면 집중력, 상상력, 공간감각, 계산능력, 지구력 등 많은 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좋고요, 어른들에게도 일종의 힐링을 제공해 줍니다. 브릭창작수업 진행한 아이 부모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습니다. 
덴마크에 오픈한 ‘레고하우스’에 출품한 작품 '코끼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은 아마추어 브릭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아들. [사진 진케이]

덴마크에 오픈한 ‘레고하우스’에 출품한 작품 '코끼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은 아마추어 브릭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아들. [사진 진케이]

아들도 브릭 갖고 노는 걸 좋아하나.
아주 좋아합니다. 관심도 많고 소질도 있고요. 레고 회사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개최한 월드컨테스트에서 국내 1위로 월드엔트리에 든 적도 있죠. 
앞으로의 꿈에 대해 말해달라.
일단 브릭아티스트가 활동할 수 있는 생태계와 산업구조를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브릭아티스트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한국 아티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무척 높거든요. 전업 아티스트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세월이 좀 흐르면 제 작업공간에서 ‘브릭 쌓는 노인’으로 늙어가고 싶습니다. 브릭아트에 대해 관심 많은 후배를 양성하면서요.
‘브릭캠퍼스’에 전시 중인 작품 'DIVE(다이브)'. 6만 개의 브릭으로 8개월 걸려 만든 작품으로 물에 대한 동경, 공포, 사랑, 모험 등을 표현했다고. [사진 브릭캠퍼스]

‘브릭캠퍼스’에 전시 중인 작품 'DIVE(다이브)'. 6만 개의 브릭으로 8개월 걸려 만든 작품으로 물에 대한 동경, 공포, 사랑, 모험 등을 표현했다고. [사진 브릭캠퍼스]

이상원 중앙일보 사업개발팀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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