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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정밀분석] 역대 ‘특수통 검찰총장’ 굴곡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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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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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총장은 경계인의 숙명을 피할 수 없다.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지휘권자인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행정기관의 수장인 동시에, 권력의 외풍으로부터 조직과 수사의 독립성을 보호해야 하는 검사의 대표자다. 각자의 전문성과 경력에 따라 계보가 나뉘는데 공안통·특수통·기획통이 대표적이다.

살아 있는 권력과 항구적 긴장관계 #문민정부 출범 후 검찰총장 19명 중 특수부 출신 8명 #특유의 수사력과 강골 기질에 중용-수난 반복돼

그중에서도 권력의 감시자를 자처하는 ‘특수통’은 특유의 수사력과 길들지 않는 야성을 겸비해 정치권력의 총애와 경계를 넘나드는 줄타기를 반복해 왔다. 특수부 검사를 ‘무사’, ‘칼잡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권력에 특수통 검사는 두려우면서도 손에 쥐고 싶은 보검인 셈이다.

특수통 검사는 지금은 폐지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등 특별수사 전담부서에서 경력과 인맥을 쌓는다. 정치권이나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관련된 크고 복합적인 사건을 다루는 데 능하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강골 기질을 명예로 여긴다. 선배 검사들에게 도제식으로 수사 노하우를 전수받기 때문에 선후배 사이의 의리도 남다르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부터 최근까지 검찰총장들의 이력을 보면 총 19명 중 특수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9명이다. 현직인 윤석열 총장을 제외한 특수통 검찰총장 8명 중 5명이 보장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그만큼 정권과 검찰조직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는 방증이다.

역대 정권과 특수통 검찰총장의 계보를 살펴보면 일정한 흐름이 감지된다. 정권 초기에 특수통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후반으로 갈수록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규칙이 반복되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사정의 칼날이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할 때 예외 없이 특수통의 고난이 시작된다.

이런 흐름이 나타나는 이유는 정치권력의 생리에서 기인한다. 정권 초기에는 높은 지지도를 기반 삼아 선거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검찰의 예리한 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밀월 관계는 불편한 결말로 이어지곤 했다. ‘정의 앞에 예외는 없다’는 검찰의 칼날이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하는 순간부터다. 옛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중견 법조인은 “시대가 바뀌어도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역대 특수통 검찰총장들의 굴곡을 돌이켜보면 ‘윤석열 사단’의 향방을 가늠하는 데 참고로 삼을 만하다”고 말했다.

민정부의 두 ‘저승사자’, “정의 앞에 예외 없다” 

문민정부 첫 검찰총장인 박종철 총장이 1993년 5월 검찰이 연루된 슬롯머신 비리 사건 수사결과와 함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문민정부 첫 검찰총장인 박종철 총장이 1993년 5월 검찰이 연루된 슬롯머신 비리 사건 수사결과와 함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1993년 3월 문민정부의 첫 검찰총장에 오른 박종철 총장은 당대의 대표적인 특수수사 베테랑으로 꼽혔다. 박 총장은 1989년 노태우 정부 때 6대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면서 5공 비리 수사를 맡았다. 여전히 기세등등했던 5공 실세들인 장세동·이학봉·차규헌 등 47명을 구속하며 강골로 이름을 알렸다. 과거사를 청산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할 YS의 눈에 박 총장은 제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고작 6개월에 그쳤다.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가 시작되면서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박희태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장관 4명과 김덕주 대법원장 등 최고위직 인사들이 줄줄이 불명예 퇴진했다. 박 총장도 결국 여론에 떠밀려 스스로 직을 내놨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였을 뿐이다. 슬롯머신 비리 수사를 진행하면서 정권 실세와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던 게 사퇴의 근본적 이유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이후 특수통이 아닌, 관리자 역할에 좀 더 충실한 인물을 연이어 총장에 앉힌 게 그 방증이다.

특수통을 다시 총장으로 불러낸 것은 레임덕이 본격화한 1997년 정권 말기에서였다. 문민정부 마지막 총장인 김태정 총장에게 주어진 가장 큰 역할은 97년 대선 정국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서울지검 특수 1·3부장, 대검 중수부 1·3과장, 중수부장 등 특수통 요직을 모두 거쳤다. 건국 이래 최대 국방 비리로 일컬어지는 율곡비리를 비롯해 슬롯머신 사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등 굵직한 사정 수사를 지휘한 경험이 있었다.

대선 직전 김대중(DJ)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비자금 의혹이 나왔다. 이회창 당시 여당 후보 진영은 의혹을 파헤쳐 달라며 DJ를 검찰에 고발했다. 선거의 명운이 검찰의 손에 넘어간 셈이었다. 김태정 총장은 비자금 수사 유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대선에 승리한 DJ는 김 총장을 유임하는 것으로 신임을 과시했다.

1999년 2월 1일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대전 법조비리사건에 대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닦고 있다.

1999년 2월 1일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대전 법조비리사건에 대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닦고 있다.

DJ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보여 주는 사례가 1999년의 검사 25명이 연루된 대전 법조비리 사건이었다.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은 검찰 수뇌부의 동반 퇴진을 요구하면서 항명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DJ는 심 검사장을 징계해 면직했다. 김 총장은 오히려 법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하지만 그는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아내의 옷값을 대신 내줬다는 이른바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면서 15일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앙숙이었던 YS와 DJ, 즉 신구권력의 신임을 동시에 얻은 검찰총장은 김태정 총장이 거의 유일하다. 10년 뒤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친 임채진 총장이 비슷한 사례지만 임 총장은 자신에게 임명장을 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김 총장은 “나를 총장에 임명한 YS와 나를 지금 신임하고 있는 DJ를 결코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지킬 수 없는 자기 운명을 토로했다고 한다.

김태정 총장에 이어 DJ로부터 첫 임명장을 받은 박순용 총장도 중수부장 출신의 특수통이었다. 그는 검찰 내 ‘빅 4’로 불리는 요직(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중수부장, 대검 공안부장, 서울지검장) 중 공안부장만 빼고 세 자리를 모두 거쳤다.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 쬐지 않는다” 

2001년 5월 25일 검찰 인사를 앞두고 이명재 당시 서울고검장이 퇴임식을 마치고 경비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듬해인 2002년 1월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2001년 5월 25일 검찰 인사를 앞두고 이명재 당시 서울고검장이 퇴임식을 마치고 경비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듬해인 2002년 1월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박 총장 취임 당시 검찰과 정권은 야당과 여론으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옷로비 사건이 정치 게이트로 비화할 조짐이 보였고, 검찰의 항명파동,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 등 악재가 잇따랐다. 야당은 2000년 4·13 총선 선거사범 수사 편파 시비를 이유로 박 총장과 신승남 당시 대검 차장의 탄핵을 추진했다. 검사동일체 원칙 폐기를 골자로 한 검찰청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해 검찰을 코너로 몰았다.

박 총장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자체 명예회복에 나섰다. 여야가 합의한 특검 도입을 막을 자구책이었다. 대검 공안부에 대한 사상 첫 압수수색이 이뤄졌고, 특별수사본부장으로부터 보고도 받지 않는 파격을 보였다.

뒤이어 역공이 펼쳐졌다. 2001년 1월 박 총장은 안기부 예산 1157억원이 1996년 총선과 1995년 지방선거 당시 신한국당과 민자당 관리 계좌로 빠져나가 185명의 개인 계좌로 흘러갔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부자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야당은 박 총장 등 검찰 수뇌부를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하며 반발했다. 국민의정부 초기 정권과 검찰 조직을 무난히 지켜 낸 박 총장은 특수통 총장 중 처음으로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뒤이어 총장에 오른 신승남 총장은 ‘이용호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동생이 연루돼 구속되는 바람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7개월 만에 직을 내려놔야 했다. 이어서 중수부장을 지낸 이명재 변호사가 총장에 올랐다. 이명재 총장은 과거 박순용 총장이 퇴임하던 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며 사표를 던진 바 있다. 이 총장은 박순용 총장과 경북고-서울 법대 동문이자 중수부장 자리를 이어받은 끈끈한 특수통 선후배 사이였다.

그가 8개월 만에 검찰로 복귀했을 때 조직은 각종 게이트 축소수사 의혹과 검사들의 연루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 특수통 특유의 돌파력과 리더십이 필요했다. 이 총장 취임 직후 두 차례 인사에서 특수통 검사들이 대거 좌천당했다. 정권 말 권력 누수가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노골적인 힘 빼기로 검찰은 받아들였다.

이 총장은 당시 서울지검 특수 1부장이었던 안대희 전 중수부장(이후 대법관 역임)을 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안 전 부장은 검사장 승진 인사에서 두 차례 연거푸 배제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진이 특수통 검사들의 사기 진작을 도모하려는 이 총장의 배려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명재 총장은 이용호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이권 청탁에 연루된 DJ의 두 아들 홍업씨와 홍걸씨를 잇달아 구속하면서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칼을 들이댔다. 당시 “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이 총장의 취임사가 다시금 회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2년 10월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취임한 지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천정배 법무장관-김종빈 총장 갈등에 특수통 몰락 

2005년 10월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에 반발해 사의를 표명한 김종빈 검찰총장(오른쪽)을 천 장관이 배웅하고 있다.

2005년 10월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에 반발해 사의를 표명한 김종빈 검찰총장(오른쪽)을 천 장관이 배웅하고 있다.

이후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송광수 총장에 이어 두 번째 임명장을 받은 김종빈 총장이 특수통의 계보를 이었다. 김 총장이 취임한 2005년 4월은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때였다. 노 대통령은 2004년 1월 탄핵소추안 국회 의결로 직무가 정지됐다가 4월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데 이어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국정 동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김 총장은 22대 중수부장 재직 당시 이용호 게이트 사건 수사기밀을 누출했다는 혐의로 신승남 전 총장과 김대웅 전 중수부장을 기소한 강골이었다. 정국 주도권을 쥔 노 대통령 입장에서 빈틈없는 일처리와 특수수사 경험이 풍부한 김 총장이 제격이었다.

마침 전임자인 송광수 총장이 중수부 폐지를 놓고 청와대에 반기를 들면서 양쪽의 관계가 어색해진 상황이었다. 송 총장은 중수부 폐지를 “검찰의 힘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라며 “(중수부가 문제를 일으키면) 내가 먼저 내 목을 치겠다”고 반발해 노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어수선한 검찰 조직을 다잡고 개혁과 정치권 사정 작업을 동시에 추진할 적임자로 내부에서 신망이 두터운 특수통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특수통을 길들일 수 있으리라는 건 청와대의 기대에 불과했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두고 김종빈 총장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정면 충돌한 것이다. 검찰이 강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밀어붙이자 천 장관은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김 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명령했다.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지휘권은 법률로 보장된 권리였지만, 실제로 발동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총장은 즉시 사표를 던졌다. 취임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행사한 두 번의 총장 인사에서 특수통은 모두 배제됐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특수통은 총장 인사에서 배제됐다. 2008년 광우병 사태로 정국이 불안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9년 5월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정권과 검찰을 향한 민심의 분노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사정 강도를 높이기보다 민심을 달래는 게 우선 과제였다.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책임이 중수부 폐지론에 힘을 실었다.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총장이었던 한상대 총장이 중수부 폐지를 받아들이려고 하자 최재경 당시 중수부장을 중심으로 특수통 검사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이른바 검란(檢亂)이었다. 사태를 관망하던 채동욱 당시 대검 차장도 가세했다. 결국 한 총장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출범한 박근혜 정부에서 특수통은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첫 검찰총장에 채동욱 전 대검 차장이 발탁됐다. 특수통 검사가 총장에 오른 것은 2005년 김종빈 전 총장 이후 8년 만이었다. 채 총장의 경력은 화려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팀에 합류했고, 2003년 서울지검 특수 2부장 때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를 파헤쳐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정대철 대표를 구속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 칼날을 들이댄 대가는 곧바로 보복성 인사로 이어졌다. 대전 서산지청장, 부산고검 등 한직을 떠돌았다.

2006년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복귀한 그는 박영수 중수부장 아래에서 최재경 중수 1과장, 윤석열·윤대진 검사 등 특수통 후배 검사들을 지도했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과 론스타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지휘했다. ‘경제 민주화’란 명분을 내세워 기업 사정을 예고했던 박근혜 정부에게 있어 기업 수사 경험이 풍부해 ‘재계의 저승사자’란 별명을 얻은 채 총장은 제격이었다.

하지만 채동욱 검찰과 박근혜 정부의 밀월관계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전 정권에서처럼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한 수사가 원인이 됐다.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인터넷 댓글 여론 조작 의혹 사건 수사를 원칙대로 밀어붙이면서 정권의 눈 밖에 났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거법 적용을 두고 채 총장과 특별수사팀은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단했지만, 공안통인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은 선거법 적용을 반대했다. 이런 와중에 혼외자 의혹이 불거지면서 궁지에 몰린 채 총장은 5개월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2013년 4월 23일에 내려진 검찰 특수수사의 상징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 현판.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중수부를 폐지했다.

2013년 4월 23일에 내려진 검찰 특수수사의 상징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 현판.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중수부를 폐지했다.

 특수통 전성기 연 채동욱-문무일

박근혜 정부의 첫 검찰총장에 임명된 채동욱 총장은 취임 5개월 만에 불거진 혼외자 의혹으로 사퇴했다.

박근혜 정부의 첫 검찰총장에 임명된 채동욱 총장은 취임 5개월 만에 불거진 혼외자 의혹으로 사퇴했다.

채 총장의 뒤를 이은 김진태 총장도 중수부 중수2과장 출신의 특수통으로 잔뼈가 굵은 검사였다. 하지만 특수통이면서도 공안통과 가까워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코드가 맞았다.

김 총장이 취임한 뒤 특수부 재정비가 이뤄졌다. 2015년 8월 검찰 인사에서 서울중앙지검 특수 1~4부에 대대적으로 인력이 보강됐다. 전국 각지에서 활약하던 특수통 검사들을 불러 모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중수부가 폐지된 뒤 전국 단위의 특수수사를 전담했던 터라 사실상의 중수부 부활이란 평가가 나왔다. 당시 법조계와 정계에선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워 사정 정국을 조성하려는 청와대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으로 특수통 집결이 완성된 뒤 김진태 총장에 이어 김수남 총장이 취임하면서 특수와 공안의 협력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김수남 총장은 취임사를 통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국가 존립과 발전의 근간”이라며 “공안역량을 재정비해 체제전복 세력이 더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면서 검찰은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된다.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취임 직후 검찰의 특수수사 역량을 서울중앙지검에 집중해 특수통 전성시대를 열었다.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취임 직후 검찰의 특수수사 역량을 서울중앙지검에 집중해 특수통 전성시대를 열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방침은 특수통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문재인 정부의 첫 총장에 오른 문무일 총장은 대검 중수 1과장을 지낸 특수통이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 특별수사팀을 이끌었고, 김경준 전 BBK 대표 기획입국 의혹을 수사했다. 노무현 정부 때에는 측근 비리 특별검사팀에 파견돼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조사했다.

문 총장은 특별수사 총량을 줄이는 대신 지청 단위에 흩어져 있던 특별수사 역량을 서울중앙지검으로 집중했다. 규모가 방대한 적폐 수사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에서 좌천됐던 윤석열 현 총장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불러들였다. 서울중앙지검은 윤대진 1차장, 박찬호 2차장, 한동훈 3차장 등 특수통들이 독식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방침에 충실했던 문 총장도 조직을 흔드는 데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문 총장은 퇴임을 두 달 남긴 지난 5월 임기 중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한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이 민주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역대 총장들처럼 직을 걸 정도로 강한 제스처는 없었지만, 현 정부가 강조해 온 ‘민주주의’와 ‘원칙’을 수차례 언급함으로써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현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문 전 총장은 임기 2년을 모두 채운 역대 세 번째 특수통 총장으로 기록됐다.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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