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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영감으로 이어진다...최순우 옛집서 '혜곡의 영감'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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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혜곡최순우기념관. 김재경 사진작가 촬영.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서울 성북동 혜곡최순우기념관. 김재경 사진작가 촬영.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김종학 화백의 수집 목가구전 '혜곡의 영감' #그에게 영감 준 혜곡 최순우 옛집서 열려 #50년 전 만남이 깨운 '감각', 그 결실의 공간 #정직하고 건강한 옛 목가구 아름다움 #

가을 오후의 햇빛이 깊숙이 들어온 한옥집. 고즈넉한 마루와 방안에 간소한 가구들이 자리를 잡았다. 옛날 선비가 앉아 글을 읽었을 서안(책상)도 보이고, 그 옆에 아담한 문갑도 보인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안에서 기척을 하고 모습을 보일 것 같은 풍경이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최순우 옛집. 최근 그 공간에 전에 없던 오래된 목가구가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1916~1984)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시작돼 김종학(82)화백이 모아온 목가구(목기 포함) 26점과 도자기와 보료 등 소품 14점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의 최순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앞장 섰던 혜곡 최순우 션생의 생전 모습. [사진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앞장 섰던 혜곡 최순우 션생의 생전 모습. [사진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혜곡최순우기념관(최순우 옛집·관장 김홍남)에서 김종학 화백의 수집가구전이 열리고 있다. 제목은 '혜곡의 영감'. 이번 전시는 한국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그의 영향을 받아 목가구를 수집해온 화가 김종학의 인연이 맺은 결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유명한 최순우는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인물.  한국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뛰어난 안목을 지닌 그는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고, 또 널리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옛집(혜곡최순우기념관)은 그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현재 전시·음악회·강연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혜곡의 영감' 전시가 열리는 현장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50년 전의 만남, 최순우-유강열-김종학

자신이 모아온 목가구 가구전 '혜곡의 영감'을 여는 김종학 화백. 서울 성북동 혜곡최순우기념관에서 만났다. 김경록 기자

자신이 모아온 목가구 가구전 '혜곡의 영감'을 여는 김종학 화백. 서울 성북동 혜곡최순우기념관에서 만났다. 김경록 기자

김 화백은 "50년 전 쯤 30대 초반이던 때 최순우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당시 최순우는 국립중앙박물관 과장이었고, 그와 친분이 있던 당시 홍익대 유강열(1920~1976)교수가 그를 김 화백에게 소개해 줬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후에 최순우의 아이디어로 김 화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판화 전시에도 참여했고, 1964년 신문회관에서 열린 첫 김 화백의 첫 개인전 때 최순우 과장과 정양모 계장이 전시회를 찾아왔다.

최순우 선생과의 만남은 김 화백이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그를 통해 조선백자가 아름답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됐고 우리 옛 목가구가 지닌 매력을 돌아보게 됐다." 당시 그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 중에 그를 세게 흔들어놓은 것은 다름 아닌 사방탁자였다.

"1963년 ‘이조문방목공예전’에서 사방탁자를 처음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분할법을 보고 우리 것이 이렇게나 현대적이었구나 하고 놀랐죠. 그때 결심했어요. 내게 돈이 생기면 이 목기들을 하나둘씩 모아야겠다고. 수집이 그때 시작됐죠. " 

김 화백은 그 인연으로 모아온 소장품 300여 점을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지금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엔 '김종학 기증실'이 있다.

김종학 화백은 사방탁자에 매료돼 목가구 수집을 시작했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김종학 화백은 사방탁자에 매료돼 목가구 수집을 시작했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사방탁자, 세계 독보적인 조형

그런데 김 화백은 사방탁자의 어떤 점에 매료됐을까. 최순우는 일찍이 그의 글에서 우리네 탁자가 지닌 '비례의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한 바 있다. "탁자의 구조는 그 비례의 아름다움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 비례의 아름다움에서 풍기는 미의 질서는 거의 실내전반의 조형미를 주름잡는다"('한국의 목칠가구', 공간,  63~69쪽, 1967). 특히 그는 "(전부 골격만으로 이루어지는)사방탁자의 경우 각층 비례의 적정이 조형의 성패를 판가름 해주고 있다"면서 "이조 탁자류의 공간미는 거의 세계 독보적인 조형"이라고 말한 바 다. 김 화백이 본 것도 그 '비례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이 한옥에 전시장이 따로 보이지 않는다. 전시 가구가 모두 집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이 집에 맞춤한 듯한 목가구와 목기들이  화백의 소장품이란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하지만 이곳에 놓인 10여 점의 큰 가구와 20여 점의 소품들은 모두 전시를 위해 옮겨온 것들이다.

'혜곡의 영감'에서 선보이는 김종학 화백의 소장품 '서안'.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혜곡의 영감'에서 선보이는 김종학 화백의 소장품 '서안'.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김 화백이 이 공간에 놓은 것은 문갑과 서안, 서탁, 지통 등 주로 사랑방 가구들이다. 김 화백의 안목으로 걸러진 가구들은 한치의 군더더기도 없어 보인다. 단순하고 질박해 보이는 데도 품격을 갖추고 있다. 화려한 색과 거침없는 붓질로 캔버스 위에 생생한 야생화를 피워낸 그의 캔버스와는 너무 다르다.

무엇이 통했는가

한지로 마무리한 의걸이장. 김종학 화백은 "콩알 같은 무쇠 경첩이 특히 아름답다"고 말했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한지로 마무리한 의걸이장. 김종학 화백은 "콩알 같은 무쇠 경첩이 특히 아름답다"고 말했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붓걸이가 이를 벽에 걸어놓고 보았을 주인의 안목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붓걸이가 이를 벽에 걸어놓고 보았을 주인의 안목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작품하고 소장품이 많이 달라 보인다는 말에 그는 "제 겨울 그림이 이 목가구들하고 많이 닮았다"고 답했다.
"오랫동안 저는 사계절을 그려왔어요.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여름꽃, 그리고 가을, 겨울. 설악산에서 40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 전통 공예품이 색을 안 썼냐 그렇지도 않아요. 훌륭한 단청의 색도 있고, 야생화 자수품을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의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죠.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한 것도 있고, 전통 보자기를 보면 몬드리안처럼 현대적인 것들도 많고요. 그런데 겨울이 되면 완전히 또 달라집니다. 제 그림엔  꽃 그림 못잖게 겨울 그림이 있어요. 그 겨울 그림이 목가구와 닮았죠."

 그는 목가구들 사이에 자신의 그림 딱 두 점을 배치했다. 모두 겨울 그림이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은 화백의 딸 김현주씨는 "안방에 전시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목가구를 닮은 면 분할이 리듬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전통 목가구와 민예품에서 보이는 비례와 리듬감이 아버지의 작품에서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왜 사랑방 가구인가

김 화백은 "화려한 안방 가구와 비교하면 사랑방 가구는 번쩍이지 않는 무쇠 등을 장식 도구로 썼을 정도로 기교를 절제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의 자연스러운 무늬까지 염두에 두었을 정도로 섬세한 매력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일찍이 최순우 관장이 이조 공예의 아름다움을 '건강하고 정직한 본성', 그리고 '간소, 순직한 표현'에서 찾은 것과 통하는 대목이다.

'혜곡의 영감'에서 선보인 김종학 화백의 소장품 문갑. 현대적인 조형미가 탄성을 자아낸다.[사진 혜곡최순우 기념관]

'혜곡의 영감'에서 선보인 김종학 화백의 소장품 문갑. 현대적인 조형미가 탄성을 자아낸다.[사진 혜곡최순우 기념관]

문갑에 쓰인 나무의 자연스러운 무늬와 색이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는 장식이 되었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문갑에 쓰인 나무의 자연스러운 무늬와 색이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는 장식이 되었다. [사진 혜곡최순우기념관]

김 화백은 이어 "사랑방 가구에서 중요한 것이 책장, 사방탁자, 문갑, 서안, 붓걸이 등"이라며 "중국 가구는 하나만 있어도 힘이 있지만, 우리 것은 여럿이 어우러져 하나로 완성된다. 우리가 정말 좋은 예술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문갑을 가리키며 "마치 풍경화처럼 검은 문양이 보이는 앞면은 먹감나무, 위와 양옆은 오동나무를 재료로 했다"며 "옛 장인들이 필요에 따라 다양한 나무를 적재적소에 쓴 것도 놀랍다"고 말했다.

김현주 큐레이터는 사방탁자에 대해 "이렇게 기둥이 가늘고, 무게가 가벼운데도 틀어지지 않는다. 나무를 제대로 단련하고 다룰 줄 아는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선 사방탁자와 문갑, 벽에 걸린 고비(문서나 편지를 꽂는 용도로 만들어진 목조 벽걸이)도 볼 수 있다. 대청마루엔 한지로 마무리를 한 의걸이장(지장)도 있다. 이곳에 전시된 지장은 김 화백이 종이를 다시 바른 것이다. 김 화백은 지장의 작은 경첩을 가리키며 "이 작은 경첩도 이 가구의 멋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며 "특히 이 경첩 부분이 좋다"고 말했다.

가구는 아니지만, 사랑방에 놓인 보료도 눈여겨볼 만하다. 본래 하얀 실크 원단이었던 것을 김 화백이 고른 배색으로 염색해 배치한 것이다.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서 수집가구전 '혜곡의 영감'전을 여는 김종학 화백. 김경록 기자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서 수집가구전 '혜곡의 영감'전을 여는 김종학 화백. 김경록 기자

김 화백은 "제가 최순우 선생 덕분에 이 아름다움을 알게 됐듯이, 더 많은 사람에게 나의 수집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우리의 좋은 것의 정수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9일 전시가 열리는  옛집의 뒤뜰에서 야외 음악회 '음악이 꽃 피는 한옥'이 열리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 오후 2시 두 차례에 걸쳐 전시해설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일·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02 3675 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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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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