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증거 없는 살인 10건 자백…"이춘재는 프로파일러와 게임 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56)가 자백을 한 이유에 대해 형사사건 전문가들은 그 의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씨의 DNA가 검출된 4건의 살인사건 외에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다수의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교도소에 복역 중인 이씨의 나머지 범행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이춘재의 자백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춘재는 9차례의 화성 사건을 포함해 다른 살인 사건 5건과 성폭행ㆍ성폭행 미수 사건 30여 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이춘재는 왜 자백을 했을까.

JTBC 9월30일 뉴스룸에서 보도한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JTBC 9월30일 뉴스룸에서 보도한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사건 주도권은 이춘재"

전문가들은 이씨가 프로파일러들과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씨가 범행을 실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확인할 수 없는 정보를 건네 혼란을 주려고 한다는 거다.
이웅혁 건국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이춘재의 자백을 프로파일러가 승리하고 이씨가 굴복한 것처럼 볼 수도 있지만, DNA 증거가 없는 나머지 10건의 살인 사건의 실마리는 여전히 이춘재의 입에 달려 있다”고 말해다. 그는 “자신의 자백이 아니면 경찰이 혐의를 밝힐 수 없다는 측면에서 주도권은 이춘재에 있다고 본다. 이를 잘 아는 이씨가 경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락펴락하는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진술 번복 가능성도" 

이 교수는 또 “연쇄살인범은 일반인과 다른 독특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 25년 동안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에 갇혀있다 수사관과 프로파일러 등이 오가는 것을 이씨가 새로운 자극,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며 “일반인이라면 비난 받을 게 두려웠겠지만 이씨는 범행을 더 과장할 수도 있고 나중에 경찰을 농락하기 위해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성범죄를 포함한 ‘성적 살인(sexual homicide)’ 범죄는 중독성이 강하고, 범행이 잔혹하게 진화한다는 점에서 이씨의 자백을 과거 사건과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씨가 저지른 강간 살인 범죄를 ‘심리적 생존을 위한 과업’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오윤성 순천향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유족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백했을 가능성과 공소시효가 지난 것을 알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의식해 자백했을 수 있다”고 했다. 임준태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과) 역시 “이씨가 자신에게 손해 보는 자백을 왜 했는지 의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DNA 결과에 무너졌나 

진술 신빙성과 별개로 이춘재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데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요원)의 잦은 면담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프로파일러들이 잦은 대면조사를 통해 정서적 친밀감과 신뢰를 뜻하는 ‘라포(Rapport)’를 형성하면서 이춘재의 심리적 방어막을 점차 무너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춘재는 애초 대면조사에서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지난주부터 서서히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성 사건(4ㆍ5ㆍ7ㆍ9차)에서 핵심 증거인 DNA가 나온 것도 이씨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경찰이 DNA 분석 결과를 알려주자 "DNA 증거가 나왔다니 할 수 없네요"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56) 씨가 화성사건을 비롯해 모두 14건의 범행을 저질렀다고 최근 자백한 것으로 1일 확인됐다. 사진은 이 씨의 고등학교 재학시절 모습.[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56) 씨가 화성사건을 비롯해 모두 14건의 범행을 저질렀다고 최근 자백한 것으로 1일 확인됐다. 사진은 이 씨의 고등학교 재학시절 모습.[연합뉴스]

이윤호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과거 조사기록과 이씨 진술을 대조할 필요는 있지만, 자의적이고 신뢰성 있는 자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DNA 등 명확한 증거를 들이대자 이씨가 부담을 느꼈거나 유가족들에게 약간의 죄의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정식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이춘재처럼 연쇄살인범이 돌변해서 자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프로파일러 9명이 들어가 이씨의 심리를 흔든 게 주효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동국대 임준태 교수도 “9차례에 걸쳐 프로파일러를 보내 이춘재의 심경 변화를 유도하는 테크닉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며 “계속되는 심문에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털어놨을 수 있다. 어차피 자백한다고 해서 범행이 완전히 입증되는 것도 아니고 증거도 없으니 이춘재의 입장에서 자백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가 자백한 14건의 연쇄살인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춘재가 자백한 14건의 연쇄살인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경찰도 이씨의 진술 신빙성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2일 브리핑에서 수사본부장인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은 “이씨가 자백했으나 기억이 단편적이고 범행 장소 등에 대해 편차가 있어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수사기록 증거, 사건 관계자를 대상으로 면밀하게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옷가지와 스타킹 등으로 매듭을 지어 몸을 결박하는 이씨의 범행 수법과 뒤처리 방식이 비슷한 사건을 포함해 화성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발생한 미제 사건을 면밀히 들여다볼 방침이다

최종권ㆍ최모란ㆍ진창일 기자 choig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