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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희생자 위에 서 있는 미 태평양공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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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미군 태평양공군사령부가 있는 하와이의 히컴 공군기지는 미군 60여 명이 죽었던 장소다. 미군 당국이 이런 과거를 잊지 않고 되새기고 있다. 지난 9일 찾았던 기지엔 파편 자국과 총탄 흔적이 남은 벽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벽 앞의 안내문엔 “공격이 있던 그 아침에 많은 공군 병사들이 죽었다”며 “(이 흔적들은) 목숨을 내준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조용한 상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아침’은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했던 그날 아침이다. 당시를 설명하던 부대 내 담당자에 따르면 그날 아침 일본군은 병영이었던 이곳을 집중적으로 때렸고, 병영 내 식당에서만 아침 식사를 위해 모여들던 미군 장병 35명이 일시에 죽었다.

태평양공군은 지구 표면의 절반이 작전구역인 미군 인도태평양사령부의 날개다. 피할 수 없을 경우 중국과 아시아 쪽 러시아를 일거에 쓸어버릴 전략 공군이 태평양공군이다. 이날 앞서 이뤄진 태평양공군 측의 브리핑에선 인도태평양사령부의 5대 현안이 등장했다. 북한-중국-러시아-테러와 환경·재해다. 군이 현안으로 지목할 땐 해당 위협을 무력화할 전략과 자산까지 강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태평양공군 측은 중국·러시아·북한의 방공망을 뚫을 전략 핵폭격기, 스텔스 폭격기는 쏙 빼고 브리핑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사실을 얘기하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도록 숨기는 재주가 있다.

태평양공군의 핵심 파트너는 일본이다. 태평양공군의 상위 단위인 인도태평양사령부의 핵심 협력국이 일본이다. 미국은 이미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미·일동맹의 영역을 동아시아를 뛰어넘어 태평양 일대로 확장시켰다. 미국 입장에선 일본 열도가 중국·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지정학적 방파제인데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 이후 아베 정부는 입속의 혀처럼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옥수수도 사 주고, 국제무대에서 중국도 견제해 준다. 지금 일본은 트럼프 정부의 대외 전략에서 최대 협조국이다.

그렇다고 히컴 기지에 있는 총탄 자국이 사라질 리는 없을 듯하다. 히컴기지 만이 아니다. 진주만 이곳의 바다에는 그날 아침 일본군이 격침시켰던 전함 애리조나호를 기억하는 애리조나호 기념관이 만들어져 미국민과 관광객을 부른다. 침몰당한 호의 선체 위에 해상기념관을 만들었다. 이 바다에서 애리조나호의 해군 1177명이 전사했다.

히컴 기지에 공습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유는 태평양공군이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부대 내 담당자에 따르면 미국이 기억할 교훈은 “우리가 적들을 과소평가했다”였다.

과거 되새기기에 관한 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남북 화해협력이 필요하다면 그리 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릴 수는 없다. 남침 한국전쟁,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은 군사적 맹동주의로 남한을 흔들려 했다. 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북진 통일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남북 관계에선 언제든 이런 과거가 반복될 수 있어서다.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을 기억하는 이유도 지금의 일본 국민에 죽창을 내밀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의 리더십은 무능하고, 국론은 중국이네 러시아네 미국이네로 갈리면 어느새 이웃은 외적으로 돌변해 강도처럼 쳐들어온다는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하와이의 히컴 기지가 아니더라도 어디서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