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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점마다 등장하는 이인영의 ‘시간론’…“레토릭 말고 정치를”

중앙일보

입력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과정, 그의 주변을 겨눈 검찰 수사 과정이 흘러가는 동안 이 원내대표는 정국의 분기점마다 “○○의 시간”이라고 해 왔다.

지난달 30일에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찰개혁을 위해 국회가 일 할 시간”이라고 했다. 대개 ‘국민의 시간’ ‘대통령의 시간’ ‘검찰개혁의 시간’ ‘민생의 시간’에는 긍정, ‘국회의 시간’ ‘자유한국당의 시간’ ‘검찰의 시간’에는 부정 의미를 담았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의_시간

처음엔 “대통령의 시간”이었다. 조 장관(당시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일정을 놓고 여야가 힘겨루기할 때다. 이 원내대표는 지난달 2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2일까지는 국회의 시간이지만, 내일부터는 대통령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시간’은 문재인 대통령이 조 장관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재송부를 요청하거나, 임명을 강행할 수 있는 시간이란 의미다. 2일이 법정 청문보고서 송부 기한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야는 당초 청문회 일정을 2·3일로 합의했지만, 가족 증인 채택 문제를 두고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날 조 장관은 민주당의 협조로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고, 이튿날인 3일 이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국회의 시간이 이렇게 끝난 것이 매우 아쉽다”며 “재송부 기한은 대통령의 시간이다. 국회의 시간도 아니고, 자유한국당의 시간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했다.

이 원내대표가 비록 법·제도의 원칙 준수를 강조한 것이라고 해도, 여당의 원내대표가 대화·타협의 여지를 ‘시간’ 규정으로 지나치게 좁힌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김형준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정치학)는 “영어로 말하면 ‘so what?(그래서 뭐?)’이다. 정치는 협상을 통해 타협하고, 필요하면 자기편도 설득해서 접점을 찾아내는 것인데 ‘누구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순간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게 된다”고 말했다.

9월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 ’○○의 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9월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 ’○○의 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국민의_시간 #검찰개혁의_시간

여야가 지난달 4일 전격 합의한 조 장관 인사청문회 날짜(6일)가 다가오자 이 원내대표는 당 확대간부회의에서 “마침내 진실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오롯이 우리 국민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야당을 향해선 “지금 이 시간은 정치권만의 시간도 아니다”라고 했고, 검찰에는 “검찰의 시간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했다.

조 장관이 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지난달 9일에는 “검찰은 대통령의 시간에 관여되지 않길 바란다”(당 최고위원회의)고 말했다. “검찰발(發) 피의사실이 시중에 유포되고 있다는 세간의 의혹이 확산되지 않도록 의관을 정제하라”면서다. 조 장관이 지난달 18일 취임 후 첫 당·정 협의를 위해 국회를 찾았을 때는 “두말할 필요 없이 검찰개혁의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의 주말 개최가 예정됐던 지난달 26일에는 “이번 주말 서초동에는 10만개의 촛불이 켜진다. 검찰개혁의 시간으로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들의 시간이 다시 시작됐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박성민 정치컨설팅민 대표는 “바깥에 문제가 있어도 정치권으로 가져와 풀어야 하는 게 정치의 존재 이유인데, 오히려 정치권이 바깥의 싸움을 부추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며 “민주당이 비판하는 검찰의 정치화, 법원의 정치화, 언론의 정치화는 본질적으로 정치가 정치를 안 해서 생긴 문제다. 정치는 갈등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어야 하는데, 최근에는 정치가 갈등의 시작이 됐다”고 꼬집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기국회에서 이원욱 원내수석부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이주영 국회부의장에게 항의를 이어가자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다가가 '항의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기국회에서 이원욱 원내수석부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이주영 국회부의장에게 항의를 이어가자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다가가 '항의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민생의_시간

이 원내대표는 추석 전후를 기점으로 꺼낸 “민생의 시간”은 그래서 ‘국면 전환용’이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조 장관 취임 이후에도 검찰 수사 관련 보도가 이어지고, 취임 후 당 지지율 하락 등 후폭풍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이 너무 경직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당 대표는 당의 정체성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런 속에서 원내대표는 조금 더 타협의 여지가 있는 유연성을 보여야 하는데, 당 대표와 같은 얘기만 하면 국회 안에서 협조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형준 교수도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여당 원내대표가 레토릭(rhetoric·수사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비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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