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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의 꼭 잡은 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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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페라 ‘1945’의 분이(왼쪽)와 위안소에서 함께 나온 일본인 미즈코 . [사진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1945’의 분이(왼쪽)와 위안소에서 함께 나온 일본인 미즈코 . [사진 국립오페라단]

지난달 27·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오페라 ‘1945’는 주제의식과 음악에서 화제가 된 문제작이다. 작품의 배경은 해방 직후. 만주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위안소에서 나온 조선 여성인 분이,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일본인 미즈코를 중심으로 고향에 돌아가려 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창작 오페라 ‘1945’ 초연 큰 호평 #주제 의식과 음악 골고루 돋보여

작품은 비극적 역사의 한 자락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선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됐지만 이런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넓은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를 한다. 등장하는 사람 대부분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발견하면 기어코 무리 바깥으로 밀어낸다. 일본인, 일본인을 사랑하는 여성, 아픈 사람, 그리고 위안부들을 증오하며 기차에 태우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무리로부터 결국 밀려나는 분이는 “조선이고 일본이고 난 모르겠어. 내 지옥을 아는 것은 미즈코 뿐”이라고 한다. 이질적인 것을 밀어내는 행동이 생존 본능에 가깝다는 점, 그럼에도 노력을 기울여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는 점을 작품은 다룬다.

오페라 ‘1945’는 2017년에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렸던 연극을 오페라로 다시 제작한 작품이다. 배삼식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꿨고 여기에 작곡가 최우정이 음악을 붙였다. 고선웅이 연출, 이태섭이 무대, 정영두가 안무를 맡아 국립오페라단에서 오페라로 초연했다. 각 부문의 노련한 창작자가 함께한 완성도는 높았다.

특히 연극 음악, 음악극을 거쳐 우리말 오페라를 여러 편 만들었던 최우정은 이번 작품에서 실험성과 대중성의 균형점을 찾았다. ‘1945’에는 여러 풍의 노래가 나온다. 1930~1940년대 유행가, 아이들의 놀이 노래, 동요 풍으로 작곡된 음악들이다. ‘엄마야 누나야’는 작품 전체에서 변주된다. 또 일본 대중가요인 엔카를 연상시키는 음악까지 등장한다. 기존 오페라에서처럼 비슷한 스타일로 반복되는 음악이 이야기 진행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 이 작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창작 오페라라고 해서 실험성에 집착했던 음악적 관행도 버렸다. 기본적으로는 조성(調性)음악으로 듣기에 편하다. 물론 규칙을 깨는 현대적 음형들이 곳곳에 등장해 드라마의 긴장감을 높인다. 또 기존 오페라에 자주 나오는 길고 난해한 아리아 독창을 최대한 줄여 오페라에 접근하는 청중에게도 문턱을 낮췄다. 한국어 창작 오페라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불분명한 가사 전달도 상당 부분 해결됐다.

출연자의 노래도 빛났다. 유럽 곳곳의 오페라 무대에 출연하고 있는 소프라노 이명주가 분이 역을 맡아 다양한 음악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조성·리듬의 변화에 순발력 있게 반응했다. 역할에 맞게 감정적이었지만 적당한 선을 넘지 않았다. 청중은 성악가의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극의 흐름을 자유로운 속도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오페라 평론가 이용숙은 “감상주의가 없는 극본은 첨예한 역사를 인류애라는 보편적 정신으로 다듬어냈고, 음악은 감정과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음악극의 궁극적 목표에 다다랐다”며 “한국 창작 오페라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했다. 서울 이틀 공연의 유료 관객 비율은 50%에 그쳤지만, 국립오페라단 측은 “평이 좋았던만큼 재공연의 여지가 있다”고 전했다. 대구 공연은 아직 남아있다. 대구 국제오페라 축제 중 하나로 4일과 5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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