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새끼 나가니 아주 편해" 엄마·아빠가 이랬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입력 2019.09.30 09:00

[더,오래] 빵떡씨의 엄마는 모르는 스무살 자취생활(3)

올해 초부터 서울에 전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동거인은 쌍둥이 동생으로 둘 다 94년생 사회 초년생이다. 동갑내기 90년대 생들이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겪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부모로부터의 독립, 연인과의 동거, 결혼문제 등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편집자>

원룸 사는 친구한테 두루마리 휴지 한 박스를 사줘도 될까. 어디 쌓아둘 데는 있으려나. 넓은 데 사는 애보다 좁은 데 사는 애 집들이 선물 고르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집도 작고 화장실은 더 작고 냉장고는 있는 듯 없는 듯 작을 테니까. 그렇다고 빈손으로 가면 욕할 테니까. 결국 먹어 치워버릴 수 있는 조각 케이크 하나를 사 갔다.

친구 D는 한 달 전쯤 자취를 시작했다. 독립을 기념해 조촐하게 집들이를 하겠다며 나를 초대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래도 내 집 같지가 않아서 잠이 안 온다’던 애가 자느라 초인종 소리도 못 듣더라. D의 집은 작고 깨끗했다. 침대에 대형 칵테일 새우 모양의 쿠션이 있어서 “이거 돈 주고 샀냐”고 물었다.

한 달 전쯤 자취를 시작한 친구 D의 자취방. 독립을 기념하는 집들이에 나를 초대했다. [사진 빵떡씨]

한 달 전쯤 자취를 시작한 친구 D의 자취방. 독립을 기념하는 집들이에 나를 초대했다. [사진 빵떡씨]

D가 푹 자서 부은 얼굴로 해외 직구로 3만 원 주고 샀다고 해 소름이 돋았다. D는 ‘저걸 누가 사?’에서 ‘누가’를 맡는 게 분명했다. D의 “그 돈 모아봤자 집도 못 사는데 사고 싶은 거 사야지”라는 변명도 납득이 가 끄덕끄덕했다.

D에게 자취하니 좋은지 물었다. D는 “좋긴 뭘 좋아, 억지로 나왔는데”라고 답했다. 의외였다. 내 또래들은 보통 독립하고 싶어 안달을 내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식이 마트에서 ‘탑블레이드’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인 것만 같은 부모들은 절대 반대하지만 말이다.

D의 상황은 달랐다. D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 직장에 다니며 전세금을 모아 나올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D의 부모님은 얼른 D를 내보내고 당신들께선 교외로 이사하고 싶어했다. 특히 D의 아버지는 D의 나이가 벌써 스물일곱이니 얼른 결혼해서 제발 좀 나가라는 입장이었다.

내 친구 중 대표적인 비혼주의자인 D는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옥신각신했다. D 아버지의 결혼에 대한 집착과 그 정정함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앞으로 20년은 더 열과 성을 다해 들볶일 텐데 D는 그 세월을 어떻게 버틸지 그저 망연하다고 했다.

지친 표정의 D는 20년까진 아니지만 정말로 2년 정도는 더 늙은 얼굴이었다. D는 ‘어디에 누구와 살 것인지’ 같은 중요한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본인에게 달려있길 원한다고 말했다.

“게임을 할 때 누가 옆에서 훈수를 두면 재미가 없잖아. 훈수를 둔 덕분에 결국 이기더라도 그게 과연 기쁠까? 내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슷한 거야. 내 인생이니까 내 판단대로 살고 싶어. 이런 마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D는 인생을 게임에 비유한 본인의 문학적 역량에 감탄하며 떡볶이를 배달시켰다. 나는 D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엄마·아빠를 생각했다. 내 부모님은 D의 부모님과는 완전히 반대다. D의 부모님이 D를 내보내는 데 혈안이었다면 내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있는 데 혈안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도시의 흉년』에는 ‘부모들은 효도에 의해서건 불효에 의해서건 자식들과 죽도록 연결되어 있기를 꿈꾼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우리 부모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자식과의 결속력을 갖고 싶어했다. 당신들의 기력이 허락하는 한 자식들을 어떻게든 집에 붙들어 놓으려 했는데 아마 많은 부모님이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집은 자라라든가 자주, 자상, 자랑 같이 자취의 ‘자’만 들어가도 조상이 다 시끄러웠다. 그런 날이면 아빠가 세 시간씩 흙산을 넘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 얘기를 듣느라 온 가족이 추억에 젖어야 했다. 이런 탓에 나와 동생은 감히 고개를 들어 자취를 쳐다도 못 보고 약 6년 동안 왕복 4시간의 통학과 통근을 해야 했다.

이대로는 못 살겠던 나와 동생은 ‘앓는 소리 중창단’을 결성했다. 직장이 집에서 너무 멀다며, 해 뜨기 전에 나가서 해 지고 집에 온다며 온갖 죽는소리를 서라운드로 해댄 결과, 올해 초에 드디어 독립할 수 있었다. 그때도 엄마·아빠는 “너희 결혼하기 전까진 끼고 살려고 했는데….”라는 말을 지나간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중얼거리셨다. 나와 동생은 “우리도 진짜 서운해”라고 말했지만 상봉하려는 눈꼬리와 입꼬리를 감출 길이 없었다.

내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기쁜 내색을 뿜어내니 엄마는 ‘좋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격한 들숨 날숨으로 매우 그렇다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는 독립해서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었다. “음... 내 방이 생긴 거?”

27년 만에 가져본 나만의 방.

27년 만에 가져본 나만의 방.

나는 독립하기 전까지 동생과 방을 함께 썼다. 집에 방이 세 개고 사람이 다섯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시간과 공간을 가족과 공유하는 게 익숙했다. 내 모든 행동은 가족들에게 공개됐고, 생각까지도 공개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내게서 가족이 차지하는 부분보다 나 스스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다. 커지는 ‘나’는 종종 오래 공상에 빠졌고, 그 공상은 비밀스러울 때가 많았다. ‘나’를 위해 아무도 나를 관찰하지 않는 방이 필요했다. 아무도 등 뒤에서 내 글을 읽지 않고 아무도 내가 생각하는 도중에 말을 걸지 않고 내가 원하는 만큼 외로워질 수 있는 방이 필요했다.

조금 더 커서는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 본가는 엄마·아빠가 왕인 작은 나라와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국민이었다. 엄마·아빠가 규칙을 정하고 경제를 일구었다. 나는 따르기만 하면 됐다. 내 자리만 잘 지키면 사랑받을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마·아빠가 정한 규칙에 동조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겼고, 내가 일구지 않은 공간은 진짜로 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든 순간부터 나는 내가 국민도 아니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엔가는 떠나 내 나라를 세워야 할 사람처럼.

올해 초, 동생과 서울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4호선 끝자락 오이도역에서 종로까지 왕복 약 3시간 거리를 통근했다.

올해 초, 동생과 서울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4호선 끝자락 오이도역에서 종로까지 왕복 약 3시간 거리를 통근했다.

그렇게 나는 야반도주하듯이, D는 유배당하듯이 본가를 나왔다. 우리는 어쩌다 물리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긴 했지만, 앞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오면 부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와 의견이 일치하는 행운이 따른다면 신께 감사할 일이지만, 높은 확률로 의견은 불일치할 것이다.

그런 순간마다 나와 D는 부모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거고, 동시에 그런 마음이 불효인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부모로부터 벗어나면서도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 아슬아슬한 고난도의 일을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그것 역시 고민이다.

요즘은 그렇게 갖고 싶던 내 방에 누워 문득문득 나와 동생이 없는 집에 이불을 펴고 누운 엄마·아빠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자식들의 빈자리만큼 들어찬 공기를 엄마·아빠는 어떻게 느낄까. 먹먹함이나 허무함 같은 것일까. 아니면 예상외로 ‘자식새끼들 없는 거 최고야! 매일 새로워!’ 같은 짜릿함일까. 후자이면 좋겠다. 그래야 떠나온 내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데미안』에는 새가 세상에 나오려면 반드시 알을 깨뜨려야 한다고 나온다. 나는 알을 깨고 훨훨 날아가기 전에 잠시 빈 둥지를 바라본다. 애써 ‘빈자리가 너무 크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해 본다.

빵떡씨 직장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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