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기우의 퍼스펙티브

허울뿐인 주민자치회 대신 제대로 된 마을 자치 도입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민주주의의 뿌리 마을 자치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대한민국에는 마을이 없다. 선진국 중에서 대한민국만 마을 정부가 없다.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 대다수의 정치사상가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공화제는 작은 마을에서만 실현 가능하다고 봤다. 1919년까지 유럽에서 거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불과 20여년 만에 떼죽음했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아돌프 가서는 내부적인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주민들이 직접 마을 문제를 결정하는 마을 자치의 전통을 가진 영국이나 미국·스위스·북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그렇지 못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은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하거나 방어에 실패했다. 그는 작은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곳에서만 큰 국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마을의 자유(Gemeindefreiheit)가 유럽의 구원(救援)이라고 했다.

자치·주민 참여 없는 주민자치회 #마을을 시·군·구 식민지로 만들어 #학교·경찰 등 주민 관련 모든 사무 #읍·면·동 마을 정부에 이양해야

제3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마을 공화국(ward republic) 건설과 공교육에 전체 공화국의 미래가 달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서 마을 문제를 해결하는 마을 정부를 기초 공화국(elementary republic)이라고 했다. 이러한 마을 공화국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국가 전체로 확장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그가 살았던 버지니아의 군(county)은 규모가 너무 크다고 했다. 이에 그는 군을 분할해서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규모로 여러 개의 마을(ward)을 만들고, 군이 수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업무를 마을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마을의 규모는 모든 주민의 직접 참여가 가능하도록 충분히 작아야 하고, 마을 업무의 적절한 수행이 가능하도록 충분히 커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퍼슨 “군을 마을로 분할해야”

그는 작은 마을 공화국이 큰 국가 공화국의 존립 조건이라고 했다. 마을 공화국은 중앙정부의 전제적인 경향과 개인 생활의 무기력을 동시에 억제한다고 했다. 제퍼슨은 1816년 조지프 카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토가 카르타고는 파멸되어야 한다고 모든 연설을 끝낸 것처럼 나는 모든 의견에서 ‘군을 마을로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고 했다. 그의 마을 공화국 구상은 시·읍·면정부(township)나 학교구 등을 통해서 상당 부분 실현되었다. 현대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제퍼슨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모든 정치 행위의 실질적인 근원인 마을을 헌법이 수용하지 못한 오류는 그들에게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고 말했다.

간디

간디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간디는 진정한 독립을 위해 평생 마을 자치를 구상하고 전파했다. 간디에게 마을은 독립적인 자치 공화국이었다. 연방은 마을 공화국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며, 국가의 모든 기능은 사실상 마을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마을은 가장 완전한 권력을 가진 탈중심적인 작은 정치 단위이므로 모든 개인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개개인은 자신의 정부를 세우는 건축가이다”라고 했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뒤진 인도에서도 1993년 개정된 헌법은 간디가 제안한 마을 자치를 상당한 수준으로 보장한다.

제퍼슨이나 간디의 마을 공화국은 농촌 마을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어 도시화한 오늘날 적용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한 지방에 하나의 큰 지방 정부만 있어 권력을 독점하면 활력은 상실되고 권력 남용으로 부패가 스며들기 쉽다. 대신에 여러 개의 작은 마을 정부가 설치되면 주민들이나 기업은 보다 살기 좋고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는 발로 하는 투표(Vote with feet)를 하게 된다. 마을 정부는 주민이나 기업을 유치하고 유출을 막기 위해서 더 좋은 서비스를 더 낮은 세금으로 제공해야  한다. 즉, 마을 정부끼리 정책 경쟁을 하게 된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이를 통해 스위스나 스칸디나비아국가들처럼 효율성이 높아지고 경제가 발전한다. 또한 주민들은 보다 좋은 마을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 행복이 증대한다. 이에 마을 자치는 농촌은 물론 대도시에도 필요하다.

실패한 모델 확산하려는 지방자치법 개정안

제퍼슨

제퍼슨

1961년 군사 정부에서 읍·면 자치를 폐지한 후 마을 자치는 우리나라에서 실종되었다. 제퍼슨이 군을 마을 정부로 나눌 것을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마을 정부를 폐지함으로써 읍·면은 다른 지방정부의 하급기관으로 전락했다. 주민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를 스스로 생산하는 대신에 소비자로 전락했다. 주민들이 직접 마을 문제를 해결하는데 참여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주권자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이에 풀뿌리 자치로서 마을 자치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20년간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들여 읍·면·동에 주민자치위원회를 도입했으나 풀뿌리 자치의 활성화에 실패했다. 이를 개선한다고 6년째 주민자치회를 시범 실시하고 있지만 별 성과가 없다. 그런데도 행정안전부는 지난 3월 주민자치회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렇게 실패한 모델을 법제화하면 진정한 마을 자치의 도입은 사실상 봉쇄된다.

개정안의 주민자치회는 마을 정부가 아니다. 주민자치회의 사무로 규정된 것은 읍·면·동의 마을 주민이 자기 책임으로 처리하는 고유 사무가 아니라 소속 시·군·구의 업무에 불과하다. 비용 충당을 위한 과세권도 책임도 없다. 주민자치회에는 자치가 없고, 주민의 일상적인 참여도 없다. 마을은 사실상 시·군·구의 식민지가 된다. 전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변질되고 왜곡된 마을 자치를 하는 나라는 없다. 제도적 상상력이 부족하다.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마을 자치에 적합한 읍·면·동

마을 자치는 그 규모가 중요하다. 마을 자치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그 규모가 평균  3200명 정도이고, 스페인이 5800명, 독일이 6700명 정도이다. 북유럽에서는 규모가 좀 크다. 핀란드가 1만6000명, 스웨덴이 3만3000명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읍·면·동은 3500개가 있으며 평균 1만4000명에 달한다.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대체로 주민의 직접 참여를 위해 충분히 작고, 마을 업무의 적절한 수행을 위해 충분히 크다.

또한 마을 정부에게 자기 책임으로 처리하는 고유 사무가 보장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마을 정부가 수행하는 사무를 우리의 읍·면·동에서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시·군·자치구는 국가와 시·도의 위임 사무와 읍·면·동에서 처리할 수 없는 자치 사무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읍·면·동 마을 정부로 이양해야 한다. 연방은 국방과 외교를, 주와 군은 치안과 법 집행을 맡고, 나머지 학교·구빈(救貧)·지방도로·경찰·사법권, 민병대 운영, 교사나 경찰의 선임 등 주민과 관련된 모든 사무는 마을 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제퍼슨의 제안은 시사점이 크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공화제를 실현하고 경제 발전과 국민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변질되고 왜곡된 주민자치회 대신에 선진국 수준의 제대로 된 마을 자치를 도입해야 한다. 주민 전체를 구성원으로 하는 자율적인 정치 단위로서 마을 정부를 세워야 한다. 지방의회를 구성하여 일을 맡기는 대신에 주민이 모여 직접 중요한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에 참여해야 한다. 마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을 주민이 세금을 통해 스스로 충당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