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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LG화학-SK이노베이션 분쟁에 정부 중재 요구 말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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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호 31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기업인은 이익이 있으면 지옥에라도 가지만, 국익을 위해선 옆집도 가지 않는다.” 오래 전 한 기업인에게서 들은 말이다. 실제로 기업인들은 ‘국익을 위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참 쉽게 말한다. 기업 관련 문제나 분쟁이 일어나면 정부에 대책을 주문하고, 정부가 중재하라거나 국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훈수를 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업 간 분쟁에 정부중재론 외치는 #전근대성이 우리 기업경쟁력 약점 #전망 밝은 기술시장 인력부족 현상 #인재 푸대접한 우리 풍토 반성 필요

한데 지난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위한 삼성그룹 차원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 이 과정에서의 뇌물공여를 인정하는 ‘국정농단사건’ 상고심 판단을 보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우리 기업과 정부의 관계, 이들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개발연대에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업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정부의존성이 강한 개발연대의 전근대성과 글로벌 경쟁시대의 현대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언저리를 맴돈다. 요즘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에 형사사건으로 번진 2차 전지 갈등을 놓고, 역시나 ‘정부가 중재하라’거나 ‘국익을 우선하라’는 훈수가 도처에서 나온다. 5개월째 계속된 이 문제를 놓고 최근 정부 중재로 두 회사 CEO가 만났다. 정부가 개입하려는 워밍업은 아닌지 살짝 염려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젠 정부도 국회도 대통령도 국민도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게 좋겠다는 거다. 속된 말로 그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도록 놔두고, 그들이 게임의 룰을 어겼을 때 그에 따른 패널티만 매기면 된다. 축구경기처럼 말이다. 축구에서 정부의 역할은 운동장이다. 규격에 맞춰 금을 긋고, 골대를 세워놓으면 된다. 경기는 선수들이 하고, 반칙은 심판이 잡고, 관중은 경기장에 뛰어들지 말아야 한다.

당연한 얘기를 굳이 하는 것은 이젠 기업들이 정부의 지원으로 발전한 개발연대의 원죄를 끊어야 할 때가 돼서다. 이 원죄 때문에 정권마다 지분을 주장하며 기업들에 이자를 받으려 들이대고, 과거의 달콤한 꿈을 좇아 정권과의 짬짜미로 재미를 보려는 기업들의 욕망은 지속됐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우리 기업들을 둘러싼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경쟁력을 갉아먹는 짓이다.

선데이 칼럼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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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입장에서 ‘LG화학 vs SK이노베이션’의 분쟁이 별로 나빠 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비즈니스세계는 전쟁터다. 어디서 태클이 들어올지 모른다. 글로벌기업 간 전쟁에선 친절하게 중재해주는 정부도 없다. 개인기로 돌파해야 한다. 전쟁경험은 전투력을 길러준다. 또 분쟁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당사자들의 강점과 약점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이번 양사 분쟁의 관건은 ‘인재유출에 따른 영업비밀과 지적재산권 침해’ 다. SK측이 경력직원 공채에서 LG에서 온 인력을 100명 가까이 뽑은 게 문제가 됐다.

모든 기술발전은 사람들의 이동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기업들의 배터리기술도 90년대 후반 은퇴한 일본인 기술고문들이 전수해 발전한 측면이 있다. 한국의 기술자들은 중국으로 넘어가 크레파스부터 반도체까지 중국 산업발전을 깨알같이 도왔다. 기업은 현장 종사자들의 기술과 기능을 사서 비즈니스를 발전시킨다. 개인에게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 한 이런 방식의 기술발전은 끝없이 이루어질 거다. 전문인력이 기업 혹은 국가 소유라는 생각은 전형적인 전근대적 사고의 편린이다.

소송에 기대되는 바도 있다. 특정 기업에서 일하며 개인의 재능으로 만든 지적재산은 어디까지 개인의 소유이고, 회사의 소유인지 기준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또 과장급 이하 직원들의 이직으로 기업이 지적재산권을 걱정할 정도라는 점도 흥미롭다. 어쩌면 부메랑인지도 모른다. 장기 경기침체로 고용주들이 우세해지면서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기업문화가 퇴보한 게 사실이다. 이와 비례해 직원들의 충성심도 낮아졌다. 요즘 직장과 직장인의 관계는 ‘가족’이 아니라 ‘긴장관계’인 경우가 많다.

최근에 왜 직장을 옮기는지 궁금해서 이직자 몇 명에게 물어봤다. 연봉때문이냐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연봉이 좀 높은 직장으로 옮긴다고, 그 차이가 인생을 바꿀 만큼은 안 된다. 전 직장 탈출이 목표였다.” 직장탈출을 꿈꾸는 이유는 비슷했다. 회사가 직원을 비용으로 여기고, 인색하며, 인간 존중이 약하고, 회사 실적과 주가 동향에만 관심을 쏟는 오너와 전문경영인들에 넌더리가 났다는 것. 이건 특정기업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혹시 이직률이 높고 업계에서 ‘경력자 사관학교’로 불린다면, 기업 내부에 직원을 내쫓는 문화는 없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배터리 분쟁으로 돌아와서, 이번 사건은 이제 막 큰 장터의 문이 열린 배터리 시장의 절대적인 전문인력 부족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이 시장은 전기자동차와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저장을 위한 중대형 배터리 시장이 본격화되면 확확 커져서 6~7년 후엔 메모리반도체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된다. 배터리·드론·AI 등 조만간 시장이 확 커질 분야는 많다. 한데 모든 신기술 분야의 인력은 부족하다. 그러니 정부가 나선다고, 이공계 인재 경시 등 사람을 푸대접하는 풍조가 만연한 나라에서 인재들이 적재적소에 화수분처럼 솟아나겠는가.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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