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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 이단아 천경자, 반찬 만들어 동료와 집밥 즐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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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호 24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천경자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나갔다. 그는 손수 지은 집밥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겼다. [중앙포토]

천경자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나갔다. 그는 손수 지은 집밥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겼다. [중앙포토]

2015년 10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화가 천경자의 추도식이 열렸다. 추모객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담배를 문 고인의 영정사진이었다. 영정사진치고는 다소 특이했지만 밥 대신 커피와 담배가 자신의 한 끼라고 말하던 천경자에게는 오히려 더 그럴듯한 설정이었다.

서촌 살 때 서양화가들과 이웃 #독신이었던 한묵에게 큰 위로 #문인·배우·가수와 폭넓게 교류 #수필가 전숙희에게 팥죽도 쒀줘 #“밥 대신 커피와 담배가 한 끼” #담배 문 고인의 영정사진 눈길

천경자(1924~2015)의 원래 이름은 천옥자다. 부모님이 주신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경자(鏡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구슬(玉)을 버리고 거울(鏡)을 택한 건 그녀의 나이 18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입학하던 해의 일이다.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는 반전의 모습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거울을 통해 반전된 나를 통해 원래의 나라고 하는 주체를 새삼스럽게 자각한다. 주체를 자각함으로써 개인은 탄생한다. 천옥자의 소녀 시절, 대부분의 여성은 개인으로 탄생하기가 힘들었다. 천옥자는 힘들게 일본으로 유학을 감행하여 천경자로 변신함으로써 비로소 독립된 개인으로 솟아올랐다.

고흥 출신, 김환기 권유로 서울 생활

개인으로 우뚝 일어난 천경자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나갔다. 그녀의 삶은 가혹과 도전이 겹치며 진행됐다.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제2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뱀 그림 ‘생태’는 충격적이었다. 35마리의 뱀들이 배배 꼬인 화면은 그림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에서 너무나 멀었다. 이 전시로 인해 비난도 받았지만 일약 유명화가로 도약할 수가 있었다. 이후 화가로서의 행보는 일사천리였다.

천경자는 전남 고흥 점암면 성기리 성주마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외탁의 문화적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재산가이자 한량이었던 외할아버지는 다섯 살 소녀 천경자에게 창을 가르쳤다. 심청가였다. 외할머니의 회갑연에서는 실력이 더해져 춘향가를 불렀다. ‘춘향아 우지 마라 가매 태와 대려가마(가마 태워 데려가마).’ 그 모습이 귀엽다고 이날 초대된 명창 이화중선이 어린 천경자를 그녀의 치마폭 속으로 끌어당겼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1942년과 43년 천경자가 도쿄여자미술학교 재학 시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조부’와 ‘노부(老婦)’ 속에서 그림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해방 후 광주에서 살다가 55년 봄 홍익대 학장인 조각가 윤효중과 김환기의 권유에 의해 홍익대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청파동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제2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 ‘정(情)’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상금과 수상작을 팔고 받은 돈을 보태어 59년 종로구 누하동 176번지 골목집의 아래채를 얻었다. 골목 끝은 이상범 화백의 작업실 겸 거처였다. 아래채의 좁은 마루가 천경자의 작업공간이 됐다.

62년에는 근처의 옥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2층에 3평 정도의 작지만 제대로 된 화실을 비로소 가질 수가 있었다. 천경자의 서촌 시대가 열렸다. 서촌에는 한묵, 이봉상 등 홍익대의 서양화과 교수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으로 지내며 살았다. 천경자는 특히 한묵(1914~2016)과 친했다. 파리로 가기 전, 서촌 시절의 한묵은 독신이었다. 서울 출신의 한묵은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한묵은 가끔 천경자를 찾아와서 식사를 해결했다. 근처 통인시장에서 장만한 재료로 반찬을 만들고 따뜻한 밥을 지었다. 천경자의 집밥은 한묵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수묵화가 지배적인 한국화 화단에서 천경자는 이단아였다. 그녀의 화려하고 과감한 발색의 채색화는 당시의 감각으로 보자면 서양화에 더 가까웠다. 박고석, 한묵 등 서양화가들을 주축으로 하여 57년에 창립한 모던아트협회에 한국화 화가로서는 유일한 멤버가 되었다. 오히려 서양화가 동료들이 한국화 화단에 우군이 적었던 천경자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셈이다.

천경자는 매력적인 문장가이기도 했다. 60년대부터 글과 그림이 함께하는 세계여행을 했다. 60년대라면 세계일주 여행가로 국내에서는 김찬삼이 거의 유일할 때다. 천경자는 파리, 뉴욕, 남태평양, 인도,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여행지 현장에서 스케치한 작품들을 현대화랑에서 전시했다. 72년 6월 이마동, 김기창, 임직순, 박서보 등 열 명의 월남전 종군화가단이 쌍발기에 실려 월남으로 향한 일이 있었다. 한국군이 참전한 월남전의 전쟁기록화를 남기기 위함이었다. 여기서도 여성은 천경자가 유일했다. 여행은 타고난 팔자였다.

73년 가을 현대화랑에서 발행한 미술잡지 화랑의 창간호 표지는 천경자가 그린 ‘팬지’다. 팬지꽃이 가득 꽂힌 화병에는 활짝 웃는 메릴린 먼로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먼로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판화에 자주 등장했다. 한국화 화가가 미국의 팝아트와 정신의 결을 공명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천경자의 글과 그림이 뿜어내는 앞선 시대감각과 이국정취의 공간감각을 젊은 여성들은 동경했다.

70년대의 대학가 다방에서는 천경자의 그림 속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을 모사하는 여대생들이 제법 있었다. 주로 작품 ‘길례언니’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 나오는 주인공을 따라 그렸다.

선구적인 여성답게 행동에 스스럼이 없었다. 강단에서도 그녀가 끼니라고 주장하는 담배를 피우며 학생을 지도했다.

자신이 그린 그림 속의 주인공처럼, 천경자의 시선은 가끔 너무 먼 곳을 향했기에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미술기자를 만나면 주로 인사동의 한식당 선천으로 향했다. 함께한 미술기자와 대화를 하다 말고 침묵으로 돌변하여 눈동자의 초점을 무한대로 늘여 현상계 너머의 세계로 자신의 영혼을 보내곤 했다. 그곳은 천경자의 반전의 주체를 드러내어 주었던 거울도 비출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이었다.

미술기자 만나면 인사동 한식당 찾아

서촌 시대에 이어 천경자는 서교동 시대를 펼쳤다. 자택의 2층이 작업실이었다. 여기서 월남전 전쟁기록화를 그렸다. “새벽밤중에 미도파(둘째 딸 김정희)가 라면을 끓여다 주고, 커피도 가져오고, 그 맛이 마치 아이 낳고 먹는 첫국밥 같이 따뜻하고 후련했었다(천경자, 나의 근작 노우트, 화랑 1973년 가을호).”

압구정동의 아파트에 살 때는 수필가 전숙희와 아래 위층이었다. “어느 날 윗층의 천경자가 사람을 시켜 놋주발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팥죽을 아래층 언니 전숙희에게 보냈다. 뜨거운 팥죽 속에 찹쌀단자가 가득 박혀 있었다. 달력을 보니 동짓날이었다(환상 속의 천경자, 1987년 11월 21일 경향신문).” 천경자는 화가들은 물론이고 문인 박경리, 전숙희, 한말숙, 배우 이덕화, 윤여정, 가수 조용필 등과도 폭넓게 교제했다. 그리고 세계를 여행했다. 수많은 사람과 지구의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섭렵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군대 간 아들이 휴가를 나오는 걸 애타게 기다리던, 홀어머니를 모시며 집을 지키며 주말이면 직접 찬거리를 구해다 식단을 꾸리던 엄마이자 딸이었다. 당대 여성들의 워너비로 등극할 만큼 화려한 일면의 천경자였지만 그에게도 소박하고 따뜻한 밥상의 시간이 있었다. 한 끼가 절실한 가족과 동료 화가들이 모여 앉았던 따뜻한 집밥의 밥상이.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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