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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슴이 텅 빈 도넛' 빵집 아들을 소설가로 키운 깨달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44)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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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동, 숨죽인 겨룸
어깨너머 익힌 춤사위
아직은 무대가 휑하더구나

조명이 꺼진 고요의 뒤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꿈과 향기를
건지려 애쓰는 단역배우의 땀방울
뜨거운 여름의 여명이 오기까지
벼리는 몸짓과 표정을 창조하고자
몸 닫아두고 영그는 수련(睡蓮) 같았어

동틀 무렵 시린 가슴 감싸 안고
몸 바깥으로 숨 가다듬으며
뜀박질하는 아이들
새벽의 숨, 물안개 더러 반갑게 맞으며
맑은 꽃잎에 맺힐 영롱한 사랑
아침이슬을 준비하라 부탁했어

살갗을 베고 나온 이슬과 땀방울에는
비릿한 연민을 담아 둘 공간이 없지 않아

가을걷이 들판에 춤추는 고추잠자리
맨손으로 잡아채려 뒤쫓는 철부지 꼬마 아이
숨죽인 겨룸은 희열, 하나의 리듬

해설

인생은 4계절, 20~30대는 여름  

한 사람의 일생을 사계절로 비유한다면 열기가 타오르는 2-30대는 여름으로 많이들 이야기한다. [사진 pixabay]

한 사람의 일생을 사계절로 비유한다면 열기가 타오르는 2-30대는 여름으로 많이들 이야기한다. [사진 pixabay]

한 사람의 일생을 사계절로 비유하곤 한다. 열기가 타오르는 여름은 20~30대를 상징한다. 학교에 다니며 자기가 꿈꾸어 왔던 분야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몸으로 부딪쳐 보는 시기다. 이때 의도하지 않던 현실에 부딪혀 전공을 바꾸거나, 자기가 바라는 일을 찾아 방황한다. 여름의 어원은 보여만 주는 봄의 모호함에서 벗어나 무엇인가 가득 차 열리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결실을 보는 시기는 아직 아니다.

산업화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가업의 전통을 잇는 일을 하기보다는 부모세대와 다른 일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직업 선택에서 고민과 어려움을 더 많이 겪는다. 부모세대가 구체적으로 충고해 줄 게 별로 없다. 어려서부터 진득하게 어떤 기술을 전수하는 일도 드물다. 그저 보편적인 이치를 설명해 줄 뿐이다.

어려서 조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그분들이 가끔 해주는 말에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빨래를 깨끗하게 잘하는 방법이라든지 음식 맛을 도드라지게 하는 비법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말씀해주셨다. 흘려들을 수 없는 뚝배기 맛 같은 깊이가 있었다. 삶의 모든 면에서 적용될만한 귀한 말씀이었다.

“얘야, 빨래를 깨끗이 하려면 방망이로 세게 두드리는 것보다 헹굴 때가 더 중요하단다. 늘 물기를 꽉 짜 버릇해야 한다.” “음식 맛은 음식이 다 끓을 때까지 불 옆에서 지켜보며 정성을 들이는 일이란다.” “모든 일에는 알맞은 순서가 있단다. 음식을 만드는 일에도 차례를 지켜야 하지.”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은 단지 손재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술이 예술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인내와 새로운 변화와 줄기찬 시도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 결과 작은 성취감이 모여 큰 희열을 느낄 때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 나오게 된다. 직접 몸으로 체득된 기술이 있어야 남보다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소설가 김연수는 자신의 마음 한가운데가 텅 빈 도넛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고백했다. [중앙포토]

소설가 김연수는 자신의 마음 한가운데가 텅 빈 도넛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고백했다. [중앙포토]

하지만 불꽃 같은 혼란스럽던 젊은 시절을 견디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중년을 개척하는 이들도 많다. 소설가 김연수는 빵집 아들로 태어난 자기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서른 즈음에 깨달았다고 ‘청춘의 문장들’이란 책에서 고백한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피아노 학원 집 딸로 태어난 카피라이터 김민철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검은 건반이었다. 좀 아주 어둡고 어느 정도는 불협화음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엄마, 나는 내가 검은 건반이라서 좋아”라는 문자를 보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업을 잇든 아니든 간에 자기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을 찾아 노력한 결과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남 보기에 그렇듯 한 직업을 찾아 나서기보다 좀 돌아가더라도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는 게 한 번뿐인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길일 것 같다.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방향전환을 이룩한 인상파는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하며 프랑스 살롱 전에 떨어진 몇몇 화가들이 작은 전시회를 연 데서 시작했다. 거기서 클로드 모네가 ‘인상, 해돋이’라는 유화를 발표했다. 처음 그들의 전시회는 비평가들의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하지만 빛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달리 보이는 자연을 표현하는 그들의 시각을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아니 누구나 사물을 그렇게 바라본다. 심지어 몇몇 사람은 숫자에서 색깔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색깔에서 소리를 듣기도 냄새를 맡기도 한단다. 이런 것을 ‘공감각(synesthesia)’이라 표현한다. 인상파의 시각이 보편화하였듯이 머지않은 미래에 공감각을 갖춘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것이다.

모네는 연못에 가득한 수련을 특히 자주 그렸다. 시인 프로스트는 “이 그림은 꽃이 만발한 옛 정원이 아니라 색채의 정원이다. 이 그림에는 위대한 화가의 시선 아래 빛나는 자연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찬양했다. 몇몇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야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수련은 물 ‘수(水)’가 아닌 잠들 ‘수(睡)’

수련은 연못 물 위에 피지만, 한자는 잠들 수(睡)를 쓴다. [사진 세미원]

수련은 연못 물 위에 피지만, 한자는 잠들 수(睡)를 쓴다. [사진 세미원]

수련(睡蓮)은 고요한 연못 물 위에서 피지만, 물 수(水)가 아니라 잠들 수(睡)를 차용해 쓴다. 뜨거운 여름 아침에 물안개가 깔려있고 그 위에 물기를 머금은 봉우리가 막 피어나는 순간을 포착한 이름이다. 활짝 벌어진 꽃보다 꿈을 꾸는 듯한 모습을 담은 수련이란 멋진 이름에 더 애착이 가지 않는가?

수련은 빛의 군무에 적확하게 반응한다. 빛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정중동의 춤을 춘다. 빛의 군무는 어쩌면 아무 일 없이 허송세월하는 듯한 사람에게 찾아드는 선물 같은 거다. 한 자리에 느긋하게 멈추어 상대를 바라볼 줄 아는 여유와 해학이 있어야 비로소 빛의 군무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일에 매달리다가 아쉬움을 느끼고 제 몸 바깥으로 달려나갔다가 다시 숨을 가다듬고 타자를 지켜볼 수 있는 순간을 거친 자라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의 기도가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는 듯이 온 세상의 사물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우리에게도 모네와 고흐처럼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여름 같은 젊은이들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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