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싱가포르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다. 당시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약 3배.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현재는 한국의 1인당 GDP가 필리핀의 10배다.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요인은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로 중산층의 ‘두께’가 꼽힌다.
필리핀 국립통계조정청장을 역임한 로물로 A 비롤라의 연구에 따르면 필리핀 가구의 74.7%는 빈곤층에 속한다. 반면 중산층은 25.2%에 불과하다. 0.1%의 상위층이 재산을 독식하다시피 한다. 국민의 구매력 향상에 한계가 있다 보니 산업이 성장할 기초 체력이 빈약했다. 반면 한국은 60~70년대 성장기를 거치며 교육받은 중산층이 늘어났고, 이들이 구매력이 커가면서 한국의 전자·자동차·철강 산업이 세계 시장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만들어줬다.
한국 외에도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의 계층 구조는 중산층이 두터운 ‘항아리형’이 대부분이다. 반면 중남미·동남아 국가에선 중산층이 얇은 ‘피라미드형’ 계층 구조가 많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중산층이 쪼그라드는 신호가 포착되고 있다. 대표적인 중산층 지표 중 하나인 ‘중위소득 50% 이상~150% 미만 비중’은 2분기 기준으로 올해 사상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2015년 67.9% ▶2016년 66.2% ▶2017년 63.8% ▶2018년 60.2% ▶2019년 58.3% 으로 4년 연속 하락세다. 질 좋은 일자리인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상·하위 소득 격차가 벌어지며 빈곤층(중위소득 50% 미만)이 늘어난 영향이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른바 ‘체감 중산층’도 감소세다. 1989년 갤럽조사에서는 75%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겼다. 3저 호황과 86아시안게임·88올림픽 등으로 나라가 성장하면서 계층 상승에 대한 낙관이 클 때다. 그러나 최근 설문 조사에서는 50%대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실제 중산층 비율은 52%이지만, 약 70%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미국(2018년 퓨 리서치센터 조사)과 대비된다.
정부는 이런 중산층 감소를 엄중하게 봐야 한다. 중산층은 경제를 지탱하는 ‘허리’일 뿐 아니라, 사회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이끌어내는 사회적 ‘안전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위축되면 우리 경제·사회의 건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현 정부의 경제운용 철학인 소득주도성장은 뒤처진 이들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게 핵심이다. 당초 취지와는 반대로 중산층이 쪼그라드는 것은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위협이 된다.
손해용 경제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