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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의 사이언스&] 은 도금만 5t…‘태양’의 부품 만드는 한국 중소기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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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초승달 모양을 한 높이 12m, 무게 15t의 구조물이 온통 눈부신 은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냥 은빛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실버, 순은(純銀)의 옷을 입었다. 본래 몸체는 스테인레스스틸이지만, 니켈로 한 차례 둘러싼 후 다시 두께 8~10 마이크로미터(㎛)의 순은 도금을 했다. 이런 초승달 모양 구조물 18쪽과 연결 부속품들이 모이면 360t에 달하는 구(球)에 가까운 모양의 완성체가 된다. 여기에 도금되는 순은은 총 5t, 금액으로 따지면 50억원을 훌쩍 넘어선다.

국제핵융합실험로 부품 공급 #1억도·영하 269도 온도차 차단 #플라즈마 담는 진공용기 제작도 #국내 중소·대기업 224개사 참여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들어설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열차폐체가 경남 창원의 삼홍기계에서 제작되고 있다. 진공용기용 열차폐체에는 5t에 달하는 순은이 도금된다. 송봉근 기자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들어설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열차폐체가 경남 창원의 삼홍기계에서 제작되고 있다. 진공용기용 열차폐체에는 5t에 달하는 순은이 도금된다. 송봉근 기자

이 거대 구조물의 이름은 진공용기용 열차폐체.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서 건설 중인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에 들어갈 부품 중 하나다. ITER는 ‘인공태양’이라 불리는 핵융합발전을 위한 실험장치다. 핵융합발전은 수십억년 꺼지지 않고 불타는 태양의 원리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수소핵융합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전기를 만들어내는 미래 에너지원이다. 이런 수소 핵융합이 태양이 아닌 지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플라즈마 온도를 위해 섭씨 1억도가 필요하다. 또 1억도의 초고온 플라즈마가 진공용기 안에 떠 있기 위해 영하 269도의 초전도 전자석이 있어야 한다. 열차폐체는 이런 극한의 온도를 서로 차단하는 핵심부품이다. 열차폐차에 순은 도금을 하는 것은 은의 성격이 열차폐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인공태양’은 한국에서 먼저 떠오르고 있었다. 지난 19일 찾은 경남 창원 진북면의 중소기업 삼홍기계 공장동에는 ITER에 들어갈 열차폐체 생산이 한창이었다. 길이 100m, 폭 25m의 공장동 4개 중 3개동에서는 스테인레스스틸 원재료를 깎고 용접해 세부 부품별 모양을 잡고 있었다. 나머지 한 개동은 길이 50m에 달하는 거대 도금 장비와 조립을 위한 공간이다. 조립동 한쪽에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은 미래를 위한 희망의 길(ITER)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초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다.

국제핵융합실험로

국제핵융합실험로

ITER한국사업단은 2014년부터 국내 산업체인 SFA·삼홍기계와 협력 하에 열차폐체의 개발과 제작을 진행해오고 있다. SFA는 반도체장비 제조업체로, 열차폐체를 제작하는 삼홍의 원청 대기업이다. 국가핵융합연구소의 설계기술과 SFA의 장비제조 기술력, 삼홍의 선박부품 제작 노하우가 어우러져 부품을 생산해낸다. 지난 17일에는 열차폐체 6번 섹터와 하부 저온용기 열차폐체 실린더가 가장 먼저 제작완료돼 부산항을 통해 프랑스로 실려나갔다. 현재 제작을 진행 중인 열차폐체는 오는 2020년 10월까지 제작을 완료할 예정이다.

허남일 ITER한국사업단 토카막 기술부장은 “ITER 열차폐체는 한국이 상세설계부터 제작까지 100% 책임지고 있는 조달품”이라며 “국제핵융합실험로 부품은 처음 만들어보는 것이긴 하지만, ITER보다 규모가 작지만 유사한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인 K-STAR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진북면 삼홍기계에서 동쪽으로 30㎞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이엠코리아도 ‘태양의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핵융합실험로 진공용기 안에서 플라즈마와 직접 접촉하는 차폐블록 제작을 맡고 있다. 이엠코리아 공장에서 만난 차폐블록은 하나가 가로·세로 1.4×1.1m의 크기에 무게 2.5t에 달하는 특수 스테인레스스틸 덩어리다. 차폐블록이 없으면 진공용기는 뜨거운 플라즈마의 온도를 견뎌낼 수 없다. 차폐블록 안에는 냉각수가 지나가는 수많은 관이 마치 혈관처럼 뻗어있다. 창원 현장에서 만난 EM코리아는 초정밀 공작기계를 이용해 스테인레스스틸 덩어리를 오차범위 2㎜ 미만으로 깎아내고 있었다. EM코리아는 2022년 9월까지 이런 차폐블록 90개를 제작·공급해야 한다.

강삼수 이엠코리아 대표는 “첫 차폐블록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만 4개월이 걸렸지만 양산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구축되면 매달 3개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며“정밀한 나선형 강선이 들어있는 전차·자주포의 포신을 만들어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차폐블록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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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태양의 부품을 만드는 한국기업은 이들 뿐 아니다. 차폐블록의 경우, 이엠코리아 외에도 전력기기 제조업체 비츠로테크도 제작 중이다. ITER는 한국에 9개 조달품목을 할당했다. 초전도 도체와 진공용기 본체, 진공용기 포트, 차폐블록, 조립장비류, 열차폐체, 삼중수소 저장·공급시스템, 전원공급장치, 진단장치가 그것들이다. 초전도 도체는 케이블과 선재 등의 세부 부품으로 이뤄져 있으며, KAT와 넥상스코리아·포스코특수강이 이미 조달을 마쳤다. 핵융합실험로의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인 진공용기 본체와 포트는 현대중공업과 51개 협력 중소기업들이 함께 제작하고 있다.

정기정 ITER한국사업단 단장은“ITER부품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7개국들이 지분비율에 비례해 나눠 공급하고 있다”며“우리나라 조달품목 9개는 국내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참여해서 만들어 나가고 있는데 실제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1·2차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기업이 총 224개사에 달한다”고 말했다.

자본력도 경험도 부족한 한국 중소기업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국제핵융합실험로 부품을 제대로 만들수 있을까. 혹여나 부품을 공급해 프랑스에서 조립한 뒤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까.  이에 대해 정 단장은 “자칫 잘못 만들어지면 그런 상황도 벌어질 수 있지만 가혹한 환경에도 견딜 수 있도록 부품에 대한 엄격한 품질 기준을 세워두고 있다”면서도 “ITER 본부에서 한국 등 부품 제작기업들을 수시로 찾아 품질 준수여부를 확인하고 있는데다 참여 산업체들이 모두 품질 준수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고 말했다.

인공태양을 만들기 위한 국제협력 프로그램 ITER는 한때 계획 추진이 늦어지면서 ‘엉터리 사기 프로젝트’라는 비난까지 받았으나, 2015년부터 정상궤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공사 진척률이 64%에 달하고 있으며, 연말까지는 68%에 도달할 예정이다. ITER는 2025년까지 공사를 완료하고, 이후에는 플라즈마 실험에 들어간다.

ITER 프로젝트는 미국과 러시아·유럽(EU)·일본·중국·한국·인도 7개국이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의 역할이 막중하다. 한국형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 K-STAR 개발 주역인 이경수 박사가 2015년부터 ITER 제작을 총괄하는 기술담당 사무차장을 맡아 공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국가핵융합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오영국 책임연구원도 지난해 7월 프랑스 ITER로 파견돼 현지 장치운영부장을 맡고 있다. 오 부장은 ITER 장치 운전을 위한 프레임워크 개발 및 유지 전략·절차 정의를 비롯해 통합시운전 및 최초 플라즈마 실험에 대한 상세계획 준비를 총괄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ITER 건설현장에는 한국 국가핵융합연구소에서 파견된 공학자 28명을 비롯 총 56명의 한국인이 활동하고 있다. K-STAR는 ITER와 같은 초전도 토카막식 핵융합 시설이다. 크기는 ITER의 3분의1 이지만, 구조와 원리는 ITER와 사실상 같다. K-STAR가 핵융합을 통해 초고온의 플라즈마까지 발생시키는 장치라면, ITER는 플라즈마를 이용해 발전에 필요한 열에너지까지 만들어내는 시설이다.

이경수 ITER 사무차장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인 2007년 완공된 K-STAR 개발 노하우가 ITER 건설에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라며 “이후로도 K스타가 현재 실험하고 있는 초고온 플라즈마 발생 및 안정적 유지 운영 노하우가 ITER로 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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