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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386 닮은꼴, 일본ㆍ프랑스에도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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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학생들이여 강의실을 떠나 바리케이트로 들어오라”
1968년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의 집회 현장에서 자주 등장했던 구호다. 지금은 좀처럼 급진적인 사회 운동을 찾아보기 힘든 일본이지만, 당시 전공투는 바리케이트와 쇠파이프로 상징되는 과격 시위로 일본 사회를 휩쓸었다.

[창간기획] 386의 나라 대한민국 ③ #일본 전공투, 프랑스 68운동 세대 #386은 반체제 넘어 기득권 입성

해외에서도 기성 사회와 권력을 거부하는 청년 세대들이 있었다. 일본의 전공투 세대와 프랑스 68운동 세대가 대표적인데, 기존 질서를 뒤집고 사회 변혁에 나섰다는 점에서 한국의 386세대와 유사하다. 하지만 실제로 권력의 정점을 차지한 386 세대와 달리, 전공투와 68 세대는 점차 동력을 상실해 사회 주류로 올라서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다.

일본의 ‘마지막’ 학생운동 전공투 

전공투의 시위 모습. 전공투는 기존 일본 학생운동과 달리 바리케이트를 치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격렬 시위를 벌였다. [중앙포토]

전공투의 시위 모습. 전공투는 기존 일본 학생운동과 달리 바리케이트를 치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격렬 시위를 벌였다. [중앙포토]

전공투 운동에 불을 당긴 건 68년 니혼대의 ‘22억엔 부정 축재 사건’이었다. 이에 항의해 시위에 나선 니혼대 학생들은 학교 당국 및 우익 성향 학생들과 충돌해 부상자를 내면서도 대학시설을 점거,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전공투 운동은 이후 도쿄대 등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전공투는 기존 일본 학생운동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기부정’과 ‘대학 해체’를 외쳤다. 일본 엘리트 교육의 ‘산증인’인 자신들을 스스로 비판하고, 그릇된 사회를 유지시키는 근원이라며 대학 해체를 주장했다. 특히 이들의 과격한 투쟁 방식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기존 일본 학생운동이 수업 방해 수준으로 이뤄졌다면, 전공투는 학교와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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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같은 극단성은 전공투의 종말을 앞당겼다. 밖으로는 폭력 시위, 안으로는 내부 투쟁이 전개되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당시 전공투는 각기 다른 사상을 가진 분파들로 갈라졌는데, 내부 분쟁이 격화되자 중핵파(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측이 혁마르파(혁명 마르크스주의파) 학생들을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결국 1970년대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을 끝으로 전공투는 사실상 일본 사회에서 퇴장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386세대는 전공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시위 방식을 택했고, 무엇보다 상명하복식의 일사분란한 ‘조직 체계’가 있었다”며 “반면 전공투는 구심점이 없었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폭력도 용인된다’는 극단주의에 매몰돼 몰락했다”고 설명했다.

‘금지함을 금지하라’ 프랑스 68세대

프랑스 68운동 당시의 사진. 프랑스에서 시작된 68운동의 바람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포토]

프랑스 68운동 당시의 사진. 프랑스에서 시작된 68운동의 바람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포토]

프랑스 68운동은 1968년 서구 사회를 휘감은 반(反)권위주의의 분위기를 타고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금지함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는 슬로건이 이 운동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낸다.

68운동은 초기엔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출발해, 점차 당시 드골 정부로 대변되는 권위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반체제 투쟁으로 확대됐다. 여기에 노동자들까지 대규모 파업 시위를 벌이며 68운동에 호응하면서 위세가 들불처럼 번졌다.

68세대는 기존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신좌파’를 노선으로 삼았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은 물론 노동해방이나 소수민족 및 여성해방을 구호로 내세웠다. 혁명의 바람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은 물론 일본의 전공투도 68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68운동은 과격한 시위 방식으로도 유명했다. 최근에도 프랑스 시위 현장에서 자동차가 불타는 등 과격한 시위가 종종 벌어지는 건 68운동의 영향이란 분석이 있다.

하지만 68운동은 68세대의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실제 68운동 직후 드골로 대변되는 보수 정부가 무너질 것이란 예측이 있었지만, 그해 6월 총선에선 오히려 드골파가 압승을 거둬 기존 200석에서 291석으로 의석 수가 늘었다. 일부 시민들 중에서는 68운동의 과격성이나 선명하지 못한 이념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도 커졌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학생들. [중앙포토]

1987년 6월 항쟁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학생들. [중앙포토]

68세대는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나마 빛을 봤다. 일부 68세대가 정치권에 입성하기도 했지만 386세대처럼 조직적인 사회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다만 세계적으로 68운동의 물결을 일으켰고 프랑스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자유, 평등의 가치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에 68운동이 큰 영향을 미친 측면은 있다.

김준석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전공투는 과격투쟁의 늪에 빠져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68세대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해 현실정치의 턱을 넘을 조직력이 부족했다”며 “반면 386세대는 반체제 투쟁과 승리의 경험을 거친 뒤, 조직력과 일사분란한 실행력을 앞세워 사회의 독점적 기득권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보기드문 케이스”라고 평가했다.

탐사기획팀=김태윤·최현주·현일훈·손국희·정진우·문현경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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