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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지옥 위에 세우는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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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인류는 역사상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전쟁·기근·자연재해·질병·폭정의 공포가 일상이던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가히 평화와 행복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진보가 만들어낸 새로운 종류의 위협과 갈등을 가리키며 오히려 과거가 더 살기 좋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으나, 마취 없이 이를 뽑아야 했던, 이유 없이 강자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그리고 삶의 대부분을 노동에 바쳐야 했던 그 과거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2)와 『Enlightenment Now』(2018)라는 책에서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고 과거를 이상화하려는 낭만적 사회 비평가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회복 탄력성은 공동체의 역량 #개인의 내면 훈련도 필요하나 #신뢰할 수 있는 관계 형성 중요

회복 탄력성, 개인이 해결해야 하나  

재난과 역경 그리고 우리 안의 악한 본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주는 축복이 많기는 하나, 삶의 역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역설적인 축복의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 자녀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Fragile)’이라는 경고장이 붙은 택배 상자들처럼 자라나고 있다. 과잉보호가 부모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서, 양육의 범위와 기한이 자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역사상 가장 안전한 사회를 구축한 나머지, 우리는 역경을 극복하는 힘을 오롯이 개인의 내부에 위치시키고, 의지만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개인의 회복 탄력성은 이상적인 인간의 필수 조건이 되었고, 회복 탄력성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개인의 훈련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의 내적 특성을 이해하고 그 특성들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회복 탄력성은 개인의 특성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특성이다.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불굴의 의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역경의 시기를 함께 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말을 건넬 수 있는 친구가 존재하고, 역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종교 공동체가 있으며, 삶의 깊은 주제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동지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혼·사별·질병·재해와 같은 힘든 일을 겪은 후에 오히려 더 성장한 사람들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의 저력은 내적이면서 동시에 외적이었다. 심리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었다.

공동체적 저력이 탄력적 개인 만들어

재난 앞에서 망연자실하면서도 그 경험이 “매우 환상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포 속에서 가장 묵직한 인간애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경은 사람들을 가깝게 만든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말을 건네고 위로하며,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깊은 전우애를 느낀다. 이런 공동체적 저력이 탄력적인 개인들을 만들어낸다. 대형 재해들을 겪은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어떻게 더 성장하는지를 분석한 레베카 솔닛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2010)는 역경을 극복해내는 공동체의 저력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힘을 키우고, 관점을 바꿔보는 노력을 통해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고통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글쓰기도 탄력성을 키우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 가십이나 잡담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 영혼, 사랑, 일, 행복, 그리고 우주에 대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닥친 정신적 혼란은 거의 재난 수준이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공동체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상대의 잘못을 엄중히 묻고 대립하고 경쟁하는 모습도 보이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주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대화들도 나누지 않을까? 도덕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우리 모두 높은 사회 계층으로의 진입을 꿈꾸지만 높은 계층의 위험성은 없는 것일까? 물리적 재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심리 서비스를 제공하듯이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제공해야 되지 않을까? 어린 학생들에게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회복 탄력성이 높은 공동체가 던질 것 같은 부러운 질문들이다. 지옥 같은 고난 위에 세워진 천국은 늘 공동체의 산물이었다.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