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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모든 사람은 평등…그러나 어떤 사람은 더 평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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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경서 번역가·문학평론가 영남대 교양학부 강사

박경서 번역가·문학평론가 영남대 교양학부 강사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문학작품에서 정치는 음악회 도중에 들린 총소리처럼 매우 시끄럽고 속된 것이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썼다. 문학작품에서 정치는 이제 현실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듯하다. 고요를 깨뜨리는 ‘정치적 총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조지 오웰 소설 『동물농장』 처럼 #평등·공정·정의 실종된 대한민국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영국의 디스토피아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을 소환해 그의 경고나 예언을 곱씹어 보게 된다. 오웰이 스멀스멀 생각난다는 것은 사회가 혼돈과 불안의 시대란 방증이다.

2017년 1월 20일 미국 사회에서 오웰을 불러냈다. 그날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다. 취임식에 참석한 인파에 대해 백악관이 전임 버락 오바마 때보다 훨씬 많은 사상 최대였다는 식으로 발표하자 언론이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백악관 측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을 제시한 것뿐”이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다시 언론은 ‘대안적 사실’이라는 말은 ‘거짓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오웰의 『1984년』의 진리부(Ministry of Truth)가 연상된다는 논평을 냈다. 이 말을 들은 독자들은 책방으로 몰려갔고 오웰의 이 소설은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금의 한국 현실을 비춰볼 때 오웰의 또 다른 소설 『동물농장』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을 다루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권력 의지가 교묘하게 작동해 정의·자유·평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늙은 수퇘지 올드 메이저(카를 마르크스를 지칭)의 유언에 따라 동물들이 농장주 인간을 몰아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법에 해당되는 ‘7계명’을 공표하고 ‘동물 공화국’을 세운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7계명은 비밀리에 수정돼 혁명 주체들인 돼지들만 인간의 옷을 입고, 침대에서 자고, 술을 마시고 결국엔 인간처럼 두 발로 걷게 된다. 혁명적 이상의 키워드인 평등·공정·정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마침내 7계명은 모순된 하나의 헛소리로 끝난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7계명을 보면 인간은 적이고 인간의 행위를 닮아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7계명의 변질은 새로운 혁명 주체들이 권력의 맛을 보면서 옛 억압자였던 인간의 행위를 닮은 독재자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사회 역시 ‘내로남불’을 외치는 권력자들의 자기 모순적 행태는 돼지들의 경우처럼 이타적인 이상이 이기적이고 자기 편향적 권력으로 부패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권력이란 휘두르는 자와 권력에 희생되는 자 모두의 존엄을 훼손시키며, 따라서 굶주린 지식인의 위선적 모습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동물농장』에서 오웰이 던지는 문학적 함의다. 비평가 로버트 A. 리의 지적처럼 능력자들은 불가피하게 악덕적이다. 또는 반대로 나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가장 유능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착하고 ‘빽’없는 일반 대중은 불가피하게 무능하다는 말이 될까.

오웰의 정치 문학은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장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타락과 권력의 부패에 대한 훌륭한 재현이다. 권력자들이 원하고 선택하고 싶은 것, 이로운 자료들만 대중이 진실이라고 믿도록 강요하고, 조작한 ‘가짜뉴스’를 ‘대안적 사실’일 뿐이라고 둘러댄다. 확증 편향과 선택적 회피에 매몰돼 내 편 네편 편을 갈라 진영 싸움의 늪에 빠진 닫힌 사회는 위험하다. 진리의 독점을 허물고 공존의 시대를 지향하는 열린 사회를 바라는 것은 유토피아적 상상에 불과한가.

박경서 번역가·문학평론가·영남대 교양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