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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사실 공표와 ‘조국 구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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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사회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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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절충이라는 말은 이번에도 무력해 보인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급부상한 ‘피의사실 공표’ 논란에서다. 각종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인권을 강조하며 철저한 금지를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앞세워 일정 수준의 공표를 용인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피의사실 공표죄(형법 제126조)는 검찰이나 경찰 등 범죄수사와 관련된 직무를 행하는 자가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기소 전 공표할 경우 성립한다.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해질 수 있다.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키라는 취지다. 사회적으로 인권이 강조되고 있어, 논의가 이뤄지는 건 자연스럽다. 다만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이라서 ‘조국 구하기’처럼 비치는 게 문제다.

경찰청은 지난 7월 말까지 법무부에 3차례 피의사실 공표 원칙을 협의하자고 공문을 보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울산에서는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와 관련해 형사들을, 서울에서는 경찰이 검사들을 같은 혐의로 수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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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요청에 묵묵부답이던 법무부가 현재의 ‘인권 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강화해 시행하겠다고 나섰다. 언론에 사건 정보를 공개할 때 수사를 원활히 하고 사건 관계인의 명예를 보호해야 한다는 준칙을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으로 개정하는 법무부 훈령 초안을 공개했다. 수사 내용을 알린 검사에 대해 법무부 장관이 감찰을 지시할 수 있도록 한 벌칙 조항이 눈에 띈다. 왜 하필 이 시점이냐는 비판이 일자 조 장관은 “가족 수사가 종료된 후부터 적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수사를 하고 있는 검사들에게는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안겨줬다.

그 와중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경찰이 공개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인 데다 범인으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다른 ‘조국 구하기’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현재 검찰이나 경찰이 주요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든 ‘조국 구하기’의 프레임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고, 논의되는 내용을 국민에게 알려 다수가 공감하는 일정한 기준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민갑룡 경찰청장, 18일 국회 의원회관 토론회) 당분간 각 수사기관이 일정 수준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더라도 큰 틀에서 사회적 합의를 얻고, 형법이나 각 기관의 훈령을 개정하는 탄탄한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처럼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다.

문병주 사회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