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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환해진 산막…잊었다, 먹구름 위엔 태양 있다는 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38)

대기의 움직임을 우리는 바람이라 한다. 그 움직임이 아주 클 때 우리는 태풍이라 부른다. 큰물과 큰바람, 큰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온갖 못 된 것, 잡동사니 쓰레기를 날려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그의 것을, 때로는 나의 것을.

당장 눈앞에 안 보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높은 곳, 낮은 곳으로 오르고 내려, 보이지는 않되 없어지지는 않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없애려 하지 말고 다름 가운데서도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면 오죽 좋겠는가?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 언제나 우리는 시종이 여일(始終如一)하고 언행이 일치(言行一致)하며 지행이 합일(知行合一) 할 것인가? 근본이 부족한 우리. 불휘 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묄쎄, 곷됴코 열음하나니 산막의 푸른 솔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광풍이 지나는 지금 남는 것은 무엇인가?

태풍은 가고 고요한 적막만이  

태풍은 가고 고요한 적막만이 남았다. 강풍에 텐트가 갈가리 찢겼다. 프레임은 의외로 강하다. 완전 무공해 토종닭 계란 두 개로 아침을 시작한다. 청명한 공기, 아름다운 자연을 보니 뜬금없이 별이 생각났다. 그래서 불렀다. 가을이다. 아무리 떠들썩해도 결국은 다 가고야 마는 것.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니 그저 담담한 마음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곡물에 갇히다 보니 먹을 게 없었다. 과수원 아저씨께 복숭아 몇 개 달라 하니 한 박스를 갖고 오셨다. 밥하기는 그렇고, 호박 몇 개에 복숭아 하나. 이만하면 족하지 않나? 저녁에는 누룽지나 하나 삶아 올리브와 함께 먹어야겠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먹기 좋아하는 내가 언제 이런 비자발적 다이어트를 해보겠는가?

추석이라고 아랫 마을 임씨아저씨가 복숭아와 사과를 박스 가득 보내셨다. 고맙게 잘 먹는다. [사진 권대욱]

추석이라고 아랫 마을 임씨아저씨가 복숭아와 사과를 박스 가득 보내셨다. 고맙게 잘 먹는다. [사진 권대욱]

저녁에는 손님들이 온다. 아리랑TV 다큐멘터리 팀은 내가 일하는 모습, 음악 듣는 모습을 찍자고, 청단 선발대는 산막의 새벽을 보고 싶은 게다. 나를 도와 손님 맞을 고마운 친구들도 함께하니 공연히 마음이 바쁘다. 움푹 팬 도로도 석산 지원을 받아 보수했고, 방 청소도 대충 했고, 테이블이며 의자들은 햇볕 좋으니 금방 마를 것이다.

음향 기사 최 사장에게 오디오며, 마이크며, 턴테이블도 손보아 달라 했으니, 대략 준비는 끝난 게다. 나는 이제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 비 온 후의 산막이 눈부시다. 바람은 산들하고 햇빛은 청명하지 더도 덜도 말고 지금만 같아라! 최고의 날씨를 선사해준 하늘에 감사한다. 늘 잊는 게 있다. 그렇구나. 먹구름 위엔 태양이 있었구나.

가끔 참 요긴하다 싶은 물건을 볼 때가 있다. 쇠로 만든 이동용 책 바구니인데, 산막용으론 딱 그만이다. 내외가 다 책은 좋아해서 방과 원두막, 바깥 부엌에 이르기까지 온통 책꽂이인데도 왠지 오늘처럼 날도 푸르고 마음도 푸르른 날은 정원에 의자 놓고 책 읽고픈 날도 있는 것이다. 그때 한 움큼 좋아하는 책들을 쇠 바구니에 쟁여 넣고 골라 읽는 재미를 아는가?

더욱이 ‘인간극장’ 제작사로 유명한 제3 비전 윤기호 사장의 책 『동영상 이야기』가 그 가운데 떡 자리하고 있음에야, 며칠 전 식사자리에서 무슨 무슨 이야기 끝에 방송일 해보고 싶다는 내 이야기에 옛친구보다 더 편안한 미소로 읽어보라 권했던 바로 그 책 아니던가. 오늘, 푸른 하늘이 있고, 읽고 싶은 책 하나 있어 행복한 나. 마음은 캠코더 들고, 나의 인간극장, 나의 식객, 나의 문화유산 답사현장으로 달려간다.

무애지지 아랫쪽에서 보는 산막의 모습이다. 늘 보는 모습도 보는 시각을 달리하면 달리 보인다. [사진 권대욱]

무애지지 아랫쪽에서 보는 산막의 모습이다. 늘 보는 모습도 보는 시각을 달리하면 달리 보인다. [사진 권대욱]

곡우는 내가 일은 안 하고 폰만 본다고 타박하고 나는 그게 아니라 일하는 것도 다 때가 있다 항변한다. 지금 나는 풀을 뽑고, 곡우는 청소한다.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뽑고 싶어 뽑는 거라 애써 생각하며, 밥 먹으라는 소릴 기다린다.

문득 생각한다. 혼자 밥 끓여 먹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던 때가 그립다고. 때론 혼자가 편하겠다 생각한다. 애나 어른이나 잔소리는 정말 싫다. 배롱꽃, 구절초, 국화도 피는 이 고요하고 바람 서늘하고 어둠 깃드는 평화의 무애지지에 잔소리라니 다음부턴 혼자 올까도 생각한다.

내려오길 잘했다 싶다. 새벽부터 내리는 장엄한 빗소리. 나는 독서당에서, 아이들은 꿈속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이제 계곡은 맑은 물 가득하고, 숲은 그 물을 품을 것이다. 그리고 맑고 청명한 어느 날 그 머금었던 물 천천히 토해 낼 것이다.

숲이 품었다가 귀히 내어 준 물로 옹달샘은 마르지 않고 연못물은 가득 채워질 것이니 버들치들도 평온하리라. 세상이 오늘만 같아라. 빛이되 눈부시지 않고, 곧되 찌르지 않는 그런 날을 기대한다. 내려오길 참 잘했다. 아니면 이 빗소리 어디서 들었을까?

산막의 연못이다. 데크와 독서당 사이에 있는 연못은 물의 철학과 시원함을 선사해준다. [사진 권대욱]

산막의 연못이다. 데크와 독서당 사이에 있는 연못은 물의 철학과 시원함을 선사해준다. [사진 권대욱]

어제의 비와 지난번 옹달샘 배관공사로 연못의 물이 풍부해졌다. 연못에 물 차는 원리는 간단하다. 들오는 물보다 나가는 물이 적으면 차고, 나가는 물이 들오는 물보다 많으면 빈다. 문득, 고교 시절 미적분 시간에 타원형 욕조에 물 차는 시간 계산하던 일이 생각난다.

연못에 물 차는 메커니즘이 그보다야 복잡하겠지만, 본질은 같다. 삶도 재물도 다르지 않다. 채우지 않고 자꾸 쓰면 결국은 빈다. 비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열고 연결하고 담고 공부하며 채워야 한다.

참을 줄 알았던 사마천과 한신 

살다 보면 소신껏 살지 못한 때가 있다. 때론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그로 인해 부끄러울 수도 있다. 괴로운 일이긴 하나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해선 안 된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견디고 사기를 썼고 한신은 과하지욕 (胯下之辱 - 무뢰배의 무릎 사이를 기는 치욕)을 참으며 후일을 도모했다. 큰 꿈을 가진 사람은 작은 일에 연연치 않는다. 반드시 이룰 일이 있는 사람은 참을 줄 안다.

언젠가는 진실이 통하리란 믿음을 갖는다. 그렇지 않다면 외롭고 서러워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길 없는 곳에서 스스로 길 되어 가고,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 되어 그 길가는 사람은 모두가 그렇다. 그렇게 참으며 가는 것이다.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 쉬다가 책을 읽다가 풀을 뽑았다. 뽑다가 힘들면 쉬고 쉬다가 무료하면 또 뽑았다. 심신이 가벼워졌다. 곤충들을 살펴보았다. 나와는 무슨 인연일까 생각해 보았다. 산막 스쿨은 이런 공부를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물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보다 깊고 좋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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