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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최고 권력된 여론조사…무지몽매한 세상 시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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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훈 작가가 19일 고려대에서 ‘디지털 시대, 연필로 쓰기’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훈 작가가 19일 고려대에서 ‘디지털 시대, 연필로 쓰기’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시대 최고의 권력은 ‘여론조사 결과’ 입니다. 그 결과가 정의·진리가 돼버렸습니다. 이것은 정말 무지몽매한 세상으로 가는 시작입니다.”

고려대 강연서 한국사회 비판 #“가장 더럽고 썩어빠진 게 언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해 관계 단절”

소설가 김훈(71)이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에 대해 “우리 시대에 가장 더럽고 썩어 빠진 게 언어”라며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 말을 할수록 관계는 단절된다”고 지적했다. “말을 할 때 그것이 사실인지, 근거가 있는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인지 구별하지 않고 마구 쏟아내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 예로 ‘여론조사 결과’를 들었다. 이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이유는 그 인간의 생각이 당파성에 매몰돼있기 때문이다. 당파성에 매몰돼있는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당파성을 정의·진리라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김훈 작가가 고려대 학생들을 만났다. 19일 오후 2시 고려대 중앙광장 CCL에서 열린 ‘작가를 만나다’ 행사에서다. 고려대는 김 작가의 모교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 연필로 쓰기’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비롯해 청년들에 대한 생각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행사는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김 작가는 자신의 글이 가지는 힘은 ‘검증할 수 없는 단어를 버리는 것’에서 온다고 말했다. “글을 쓸 때 내가 검증할 수 없고, 내 생애로 확인할 수 없는 단어를 절대 쓰면 안 되겠다는 원칙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글을 많이 썼지만 사랑·희망·꿈·미래와 같은 단어를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며 “앞으로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을 고수하는 이유도 밝혔다. “연필로 글을 쓰면 ‘내 살아있는 육체가 글을 밀고 나가고 있구나’ 하는 확실한 삶의 근거를 느낄 수 있다”며 “글과 삶과 몸이 연필 안에 모여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즐거움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작품에서 잘 드러내지 않았던 유년 시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48년생인 그가 3살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7박 8일 동안 피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훗날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김 작가는 “당시 자리가 부족해 피난민들은 열차 지붕까지 가득 메웠다. 이 과정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며 “그런데 그 자리에 일부 자산가들은 부산까지 피아노·전축기를 싣고 갔다. 그 피아노로 연습해 훗날 음대 교수가 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이런 나라의 가난과 억압의 유산을 물려받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시대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리라는 두려움이다”고 설명했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4편의 역사소설을 쓴 김 작가는 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내 책에는 역사는 없고 인간만 있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각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회 현상은 무엇일까. 그는 “현재 노동자의 안전 문제를 걱정하는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라며 “내가 앞장서서 단체를 이끌어 나가는 건 아니고, 젊은 활동가들이 부탁하는 대로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젊은이들이 떠미는 대로 내가 밀릴 수 있게 기꺼이 몸을 내어주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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