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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일 갈등의 치킨게임과 출구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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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주 학술회의로 일본에 다녀오기 위해 엔화를 바꾸려 집 부근 은행에 들렀다. 은행원이 요즘 같은 민감한 시기에 일본에 가도 되냐고 물어왔다. 회의에서 만난 일본 경제학자들은 한·일 관계가 이런데 일본 와도 되냐고 농담처럼 인사를 했다. 한·일 갈등이 민간 교류 전반으로 확대될까 걱정이다.

양국간 갈등의 치킨게임으로 #모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협상과 출구 전략 필요한 때 #양국 지도자가 해법 찾아야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이유 없는 반항’ 에는 치킨게임, 즉 누가 겁쟁이인지를 가리는 게임이 나온다. 절벽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늦게 탈출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다른 치킨게임에서는 마주 보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먼저 핸들을 돌리는 쪽이 진다. 겁쟁이가 되지 않으려고 계속 질주하면 정면충돌하여 둘 다 크게 다칠 수 있다.

한·일 갈등이 두 자동차 운전자가 서로 마주 보고 가속 페달을 계속 밟는 치킨게임을 닮아 간다. 작년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위자료 청구권이 있다고 판결하고, 일본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제삼자 중재위로 갈 것을 요구하다가 보복 조치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의 수출절차를 강화했다. 지난달 28일에는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 국가)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한국은 일본의 부당한 수출 규제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고 지난 18일부터 일본을 화이트 국가에서 배제하는 조치로 대응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도 종료하겠다고 결정했다. 과거사 갈등이 경제, 군사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지소미아가 11월말에 종료되고 일본 징용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가 내년에 실제 시행되면 양국 간 갈등이 어떻게 증폭될지 알 수 없다.

한·일 갈등은 이미 양국 간 경제교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경제의 성장 둔화와 겹쳐서 한국의 대일본 수출은 8월에 지난해 같은 달 대비 6.2% 줄었다. 대일본 수입도 감소했다. 일본 자동차 수입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57%, 맥주 수입은 무려 95%가 줄었다. 일본으로 여행하는 한국인의 수도 줄었고 한국에서 철수하는 일본 기업도 나오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산업구조의 연관성이 높다. 양국 간 무역, 투자로 상호 이익을 보는 관계다. 한국은 일본의 제4위 수출시장이고 일본은 한국의 제5위 수출시장이다. 중요한 무역파트너가 상대방에게 손해를 더 많이 입히겠다고 싸우는 형국이다. 원료, 중간재, 부품을 여러 국가가 나누어 생산·수출하고 수입국이 다시 가공·조립하여 최종 상품을 만드는 국제분업 구조에서 한국과 일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출 규모에서 중국, 미국, 독일에 이어 일본은 세계 4위, 한국은 5위이다. 중국과 미국이 무역전쟁을 하는 마당에 한·일 무역분쟁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가 파급효과를 걱정한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 무대에서 자유무역의 선도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양국이 서로 무역보복을 하면서 세계무역질서를 파괴하고 세계경제에 피해를 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역사, 정치적 현안을 가지고 부당하게 무역보복을 시작한 일본의 책임이 더욱 크지만, 한국도 분쟁에 계속 불을 지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됐다.

한·일은 아직 경제력에서 많은 격차가 있다. 한국의 총생산(GDP)은 일본의 삼 분의 일 수준이다. 과학기술, 국제정치 측면에서도 일본이 한국보다 우월하다.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할 만큼 한국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보복 조치를 계속하면 한국의 경제적 피해가 더 클 수 있다. 세계경제의 불황 조짐으로 우리 경제의 위험이 커진 상황이다. 한·일 갈등으로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불안이 커지면 안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 경제자문회의에서 “무역보복 조치는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승자 없는 게임”이라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보복 조치를 계속하기보다는 협상으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발단인 징용 문제부터 해법을 찾고, 그 이후에 벌어진 무역, 외교 보복 조치는 두 국가가 모두 원상회복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일본이 징용 피해자를 배상하도록 설득해야겠지만, 우리가 ‘도덕적 우위’의 입장에서 일본의 금전적 배상에 연연하지 않고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방안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양국의 지도자가 직접 마주 앉아 신뢰를 회복하고 해법을 찾을 수 있으면 최선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상들이 만나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기류가 양국 모두에서 강하다. 그러나, 정·관계, 경제단체, 양국 전문가들이 나서서 꾸준히 노력하면 올해 11월 이후 동아시아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한·중·일 정상회담 등 다자 회의에서 양국의 지도자가 마주 앉아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치킨게임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물쭈물하다가 실수로 파국을 맞을 수 있다. ‘이유 없는 반항’에서는 차 문에 옷자락이 걸려 탈출하지 못하고 자동차와 함께 절벽으로 추락한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부당함에 대응하면서도 적절한 출구전략을 준비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올해 내로 양국 간 갈등을 해소할 반전의 계기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