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발자취 따라|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연변 기행<2>|일의 만주침략 기폭제 "만보산 사건"

중앙일보

입력 1989.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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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비자를 받기 위해 홍콩에서 2박한 후 드디어 중국민항에 몸을 실은 것은 8월4일 정오였다. 그런데 뜻밖에 기내에는 손님이 너무도 적었다.
1등석에는 나를 포함해 2명, 그리고 2등석에 겨우 20∼30명만이 탐승한 기내는 마치 텅 빈 듯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천안문사건 이후 외국인들이 중국 여행을 꺼려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던 마음이 좌우로 텅텅 빈 좌석들을 돌아보자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오후4시에 내린 북경공항은 1990년의 아시안게임을 위해 수리 중이었고 수속이 까다로워 짐을 찾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출구를 나서자 길림사회요학원 연변역사연구소의 한준광소장과 북경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동북문화연구중심주임인 풍홍지씨 등 여러 사람들이 따뜻한 환영을 베풀어 주었는 데, 그 중에서도 한소장은 연길시에서 일부러 북경까지 먼길을 마중 나와준 것이어서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안내로 여장을 푼 곳은 자금빈관이었다. 자금빈관은 대단히 규모가 큰 호텔로 중국의 고 건축을 본떠 지은 아름다운 건물이었으나 손님은 나와 한소장 단 2명뿐이어서 오히려 민망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천안문사건 이전에는 한달 전에 미리 예약하기 않으면 객실을 구할 수 없었다는데 요즈음은 자금빈관 뿐 아니라 북경반점 등 대부분의 호텔들이 거의 비어있다시피 한다고 한다.
이튿날인 8월5일 아침에는 한소장, 풍연구원 등 일행과 함께 상의한 끝에 우선 중국역사박물관을 관람하기로 정하고 숙소를 나섰다.
천안문거리에 있는 중국역사박물관에 도착하니 정문을 경비하고 있던 계엄군이 앞을 막았다. 현재 박물관 안에는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어 폐관상태이므로 절대 관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정일선생 방문>
순간적으로 실망감이 덮쳐왔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일정을 바꾸어 전에 조선독립동맹에서 주요인물로 활약했던 문정일 선생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고 전에도 한국에서 안춘생 독립기념관 관장과 김구선생의 아들인 김신장군, 그리고 김준엽 전고려대총장 등이 자기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낯설지 않은 태도로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사양하는 일행에게 굳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하여 같이 식사를 하며 문선생은 몇시간에 걸쳐 자신의 과거 항일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또 그것을 녹음하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문선생과의 대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빌려 좀더 자세히 소개하고자한다.
오후에는 중앙민족대학·북경대학 등을 방문하였으나 방학중이라 교수들과 만나볼 기회는 갖지 못하였고 다만 에드거 스노가 살았던 유적지와 북경대학 총장이었던 채원배의 동상 등을 관람했을 뿐이었다.
다음 방문한 곳은 중국군사인민혁명박물관 이었는데 그 입구 광양에서는 이번의 천안문사건으로 인해 파괴된 많은 군사장비(전차 등)를 전시하고 또 실내에도 특별전시실을 만들어 그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도록 진열하고 이러한 전시는 어디까지나 현 집권층의 입장에 역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였다.
8월6일에는 만리장성과 13능을 구경하고 다음 7일에는 한소장과 함께 북경을 떠나 장춘으로 향했다.
장춘비행장은 마치 시골의 어느 마을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으며 길림성 사회요학원 조선연구소의 양소전소장과 송정환연구원 등의 마중을 받고 남호빈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이튿날은 일행과 함께 길림시를 돌아보았다. 길림대학 길림성 역사박물관을 위시하여 여러 곳을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진세장·서경소·단국림 등 여러 중국학자들의 내방을 받아 현 중국 역사학계의 동향 등에 관해 학담을 나누었다.
이어 저녁에는 길림대학의 이문철·김순희·김성란·조수향 등 여러 교수들의 초대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올림픽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저녁 후 숙소에 돌아와 보니 어느 누구보다도 반가운 중국인 손님 두 사람이 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한번 만나기를 소원해 봤던 사람들로서 바로 심양사회요학원의 담역과 왕형 연구원이었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만보산 사건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밤늦게까지 이 사건에 관해 토론하였고 그러다가 다음날 함께 만보산에 가보자는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들과 얘기하는 동안 재미있게 느꼈던 것은 같은 사건을 놓고서도 서로 해석이 다르다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각자 어떤 민족에 속하느냐 하는데서 기인되는 듯 하였다. 즉 그들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렇게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한·중 양민족 이간>
이해를 돕기 위해 만보산 사건이 무엇인지 간단히 언급해본다면, 이것은 1931년7월2일 중국 동북지방(즉 만주)의 만보산 지역에서 일어난 한·중농민간의 충돌사건이었다. 만주 침략에 있어 한국인들을 이용코자 했던 일제는 전통적 농경지대인 만보산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일단 이곳에 한국인들을 보내 농토를 개척케 하였다.
물론 중국인측에서는 한국 농민들에 대한 반발을 노골적으로 나타냈으며 이런 상황에서 한국 농민들이 수노공사를 강행하자 드디어 쌍방간에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침략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이 사건을 과장 보도했고 이로 인해 한국 내에서는 일시 중국인 배척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중 양민족을 이간시키려는 간악한 일제의 술책임을 간파한 민족지도자들과 민족 계열 신문의 노력으로 신속한 수습책이 마련되었고 오히려 한·중 양민족은 그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여 배일의 공동 전선을 이루게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만보산 지역을 찾아보기 위해 담역과 왕형·한소장 등 우리 일행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자동차를 전세 내어 길을 떠났다. 만보산 사건 연구로 학위를 받은 나로서는 이제야 직접 만보산 현지에 가본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사건이 일어났던 1931년 7월 당시 만보산의 행정 구역은 길림성 장춘현향 만보산 삼구 삼성보였으나 현재는 길림성 덕혜현 만보진 삼구 삼성향 이구로 되어 있다.
장춘에서 동북으로 약80리 정도의 길이었는데 떠나기 전에는 길을 잘 안다고 큰소리치던 운전기사가 결국 길을 모름이 밝혀져 물어 물어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운전기사들은 외국손님이 승차했을 때에는 일단 목적지를 안다고 대답해 놓고 본다는 것을 뒤에야 듣고 웃었다.

<끝도 없는 대평원>
만보산으로 가는 길옆의 풍경은 산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끝없이 펼쳐지는 광막한 평야뿐이었다. 기름진 땅 때문인지 벼가 대풍을 이루고 있었고 간혹 밭농사를 하는 곳도 보이기는 했다. 포장이 안된 길에는 먼지가 많았고 비가 왔을 때 패인 웅덩이들이 그대로 울퉁불룽 남아 있어 자동차가 덜컹거리는 통에 차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엉덩이에 멍이 들 정도였다.
우리 말고 다른 자동차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두마리 혹은 세마리 정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주요 운송 수단인 것 같았다. 옛 우리 부여의 중심지이던 농안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 대평원을 바라보자니 문득 머릿속에 이상룡의「석주유고」가운데 나오는「부여구강」이란 글귀가 떠올랐다.
또 건강한 양마들을 보고 있으니 이런 말을 타고 이런 대평원을 힘차게 달렸을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대여섯 시간을 이렇게 험한 길을 달려 드디어 만보진에 도착하였다. 만보진은 우리나라면소재지 정도의 소도시였는데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20리 정도 떨어진 삼성향을 향해 출발하였다.
삼성향으로 가는 길 역시 험해 어떤 때는 내려서 차를 밀고 가야 할 정도였다. 삼성향에는 현재 약1백50가구 가량이 살고 있으나 한국인은 한사람도 없다고 하며, 주민들에게 들어보니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에 국부군이 와서 한국인 11명을 총살한 후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현재「만보산사건구지」라고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이통하를 지나서 그 제방 너머에 있는 마가초구 마을을 찾아 물었더니 그곳 사람들은 그 당시 한국인들이 파놓은 수노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마침 그 당시 만보산 사건을 직접 체험했다는 마만림 노인을 만나 그의 안내로 한국인이 파놓은 수로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실감나는 증언도 들을 수가 있었다.
이통하의 제방 위에 서서 그 넓디넓은 평야를 바라보자니 이곳 중국의 오지까지 들어와 벼농사를 지으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쳤을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날처럼 이 평원이 풍요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밭농사 밖에 모르던 중국인들에게 벼농사 기술을 가르친 우리 농민들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민족의 끈기 확인>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 정책에 휘말려 무참한 희생을 당하였고 그렇게 그들이 힘들여 개척했던 이곳에는 이제 단 한사람의 한국인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문득 가슴이 뭉클하고 역사의 무상함마저 느껴지기도 하였다.
만보진 일대의 풍경은 마치 어릴 때의 고향 마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복숭아·참외같은 과일도 그렇고, 길에 돌아다니는 돼지들도 어릴 때 보던 재래종들이었다. 또 집들도 거의 초가집으로서 불결하기가 그지없었으며 문맹도 많다고 한다.
온 길을 생각하니 돌아갈 걱정이 태산같았지만 10여년 이상 연구해 왔던 그 만보산 사건의 발생지를 이제야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만족감이 그 걱정을 쉽게 잊도록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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