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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버섯처럼 번지며 총기난사범 양성하는 '미국판 일베' 에잇챈

중앙일보

입력

꼬리 무는 백인우월주의 총격 테러

최근 서구 국가에선 일반 시민에게 총기를 무차별 난사하는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AP=연합뉴스]

최근 서구 국가에선 일반 시민에게 총기를 무차별 난사하는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AP=연합뉴스]

#지난 3월 15일 호주 출신 총격범 브렌턴 태런트(28)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다. 이슬람 사원(모스크) 두 곳에 난입해 총으로 50여 명을 살해했다. 태런트는 카메라가 달린 헬멧을 쓰고 범행 장면을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9일 뒤인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의 한 모스크에 누군가 불을 질렀다. 방화범은 벽에 “브렌턴 태런트를 위하여”란 그래피티를 그렸다. 한 달 뒤 샌디에이고 인근 파웨이의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에선 백인 남성 존 어니스트(19)가 총기를 난사했다. 60대 여성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에 붙잡힌 어니스트는 에스콘디도 모스크 방화도 자신이 했다고 진술했다.

 CCTV 카메라에 찍힌 엘파소 총기난사범 패트릭 크루시어스의 범행 당시 모습.[UPI=연합뉴스]

CCTV 카메라에 찍힌 엘파소 총기난사범 패트릭 크루시어스의 범행 당시 모습.[UPI=연합뉴스]

#8월 3일 미 텍사스주 엘파소의 한 대형쇼핑몰에서 백인 남성 패트릭 크루시어스(21)가 총을 쏴 22명이 숨졌다. 같은 달 12일엔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모스크에선 백인 남성 필립 만스하우스(21)가 총기를 난사해 1명이 다쳤다.

최근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들이다. 여기엔 공통점이 있다. 용의자들이 범행 직전 극우사이트에 인종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이트가 미국 온라인 게시판 ‘에잇챈(8chan)’이다.

뉴질랜드 총격범 태런트는 범행 전 에잇챈에 73쪽 분량의 반(反)이민 선언문을 올렸다. 존 어니스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무슬림과 유대인 같은 ‘이민족’이 백인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니스트는 선언문에서 태런트의 범죄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엘파소 총기 난사범 크루시어스도 범행 전 에잇챈에 “히스패닉이 미국을 망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총기난사범 양성소 원조는 에잇챈

백인우월주의 성향의 극우사이트 에잇챈의 로고. 현재 사이트는 접속이 차단된 상태다.[사진 트위터]

백인우월주의 성향의 극우사이트 에잇챈의 로고. 현재 사이트는 접속이 차단된 상태다.[사진 트위터]

에잇챈은 익명 온라인 게시판 포챈(4chan)에서 2013년 갈라져 나왔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에잇챈 설립자 프레드릭 브레넌은 포챈이 사용자들의 발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에잇챈을 만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에잇챈에선 글을 쓸 때마다 ID가 랜덤으로 부여돼 익명이 보장된다.
다른 곳에서는 금기시되는 네오나치·홀로코스트·대량학살·인종차별에 대한 글이나 농담, 혐오 표현이 허용됐다. 자신들만의 은어를 쓰기 때문에 일반 사람은 알아보기 어렵다. 국내 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와 닮았다.

에잇챈은 2014년 남성들이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한 여성을 온라인 상에서 공격한 ‘게이머게이트’ 사건으로 포챈이 관련 게시물을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포챈 이용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규모가 커졌다. 국내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극우 성향 이용자들이 ‘일베’로 이동한 것과 유사하다. WSJ에 따르면 에잇챈의 이용자 비율은 18~34세의 남성이 57.2%로 절반을 넘었다.

백인우월 찬양…게임하듯 테러 조장

지난 4월 미국 샌디에이고 총격 사건을 일으킨 범인 존 어니스트가 범행 전 에잇챈에 올린 게시글.[사진 월스트리트저널 캡처]

지난 4월 미국 샌디에이고 총격 사건을 일으킨 범인 존 어니스트가 범행 전 에잇챈에 올린 게시글.[사진 월스트리트저널 캡처]

미국 포린폴리시는 에잇챈의 일부 이용자들에게서 ‘테러의 게임화’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테러범 어니스트의 글이 에잇챈에 올라오자 에잇챈 일부 이용자들은 “(뉴질랜드 테러보다) 더 높은 점수를 올려야 한다”며 마치 게임에 나선 선수를 응원하듯 어니스트를 부추겼다. 노르웨이의 극단주의연구센터의 토레 보르고 소장은 WSJ에 “범인들은 에잇챈과 같은 극단주의 사이트에서 이용자들에게 인정받고 명성을 얻으려 서로 경쟁한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연쇄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왼쪽)가 지난 2011년 오슬로 지방법원에서 구금심리를 마친 뒤 이송되고 있다.[AFP=연합뉴스]

노르웨이 연쇄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왼쪽)가 지난 2011년 오슬로 지방법원에서 구금심리를 마친 뒤 이송되고 있다.[AFP=연합뉴스]

에잇챈 이용자들에게 2011년 노르웨이 총기난사범 안드레스 브레이비크는 영웅이자 인종전쟁의 시조다. 브레이비크는 당시 오슬로 정부청사 앞에서 폭발물을 터뜨리고 우퇴위아섬에서 청소년들에게 총기를 난사해 77명을 살해했다.
태런트는 에잇챈에 쓴 성명서에서 브레이비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여기서 생산된 각종 인종주의적 혐오글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타고 확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4월 이전까지는 브레이비크가, 이후부터는 크라이스트처치 테러범 태런트가 전세계 극단주의자들을 모으는 구호(Rallying cry)가 됐다”고 전했다.

에잇챈 폐쇄해도…모방사이트·텔레그램으로 퍼져

지난달 5일 한 시민 운동가가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전미총기협회 건물 앞에서 총기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는 의미의 피켓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5일 한 시민 운동가가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전미총기협회 건물 앞에서 총기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는 의미의 피켓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잇따른 총기난사 범죄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에잇챈은 지난달 초 폐쇄됐다. 하지만 총기난사 범죄의 위험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에잇챈을 대신하는 또 다른 사이트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노르웨이 총기난사범 만스하우스는 범행 전 극우 사이트 ‘엔드챈(Endchan)’에 성명서를 올렸다. 만스하우스는 성명서에서 “나는 ‘성인(聖人)’ 태런트의 선택을 받았다”며 “이제 내 차례다”라고 주장했다. 엔드챈은 에잇챈의 모방 사이트다. 엔드챈은 곧바로 글을 삭제했지만 해당 내용은 다른 사이트로 퍼져 나갔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총기난사 범죄를 저지른 브렌턴 태런트가 지난 3월 범행 직후 법정에 선 모습.[로이터=연합뉴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총기난사 범죄를 저지른 브렌턴 태런트가 지난 3월 범행 직후 법정에 선 모습.[로이터=연합뉴스]

같은 달 13일엔 뉴질랜드 교도소에 수감 중인 태런트가 쓴 6장 분량의 편지가 에잇챈의 원조 사이트 포챈에 올라왔다. 포챈을 떠났던 극단주의자들이 에잇챈이 폐쇄되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피터 노이만 런던 킹스칼리지 안보학과 교수는 가디언에 “에잇챈 폐쇄로 극우주의자들의 가상 네트워크가 제거됐다는 생각은 틀렸다”라며 “그들은 다른 온라인 게시판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WSJ는 “백인 우월주의 같은 혐오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이들은 관련 사이트가 폐쇄되면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다”며 “심지어 텔레그램과 같은 암호화 채팅앱으로까지 이동해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4일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의 쇼핑몰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현장에서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다발 등이 놓여있다.[AP=연합뉴스]

지난달 4일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의 쇼핑몰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현장에서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다발 등이 놓여있다.[AP=연합뉴스]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대테러 전문가 클린트 와츠는 워싱턴포스트에 “에잇챈 같은 온라인 공간은 백인 민족주의 극단주의자들이 모여 더욱 극단화하고, (살인) 계획을 짜고, 선언문을 공유하는 장소가 됐다”면서 “따로 떨어져 있던 극단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테러의 속도와 치명도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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