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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도로 밑은 귀신같이 사라진 40대 절도범의 은신처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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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도심의 한 고가도로 철골 구조물 내부 2~3평 공간에 이불이 깔려있다. 그 옆으로 라면·과자 봉투, 빈 음료수 페트병이 가득하다. 삼겹살을 구워 먹고 라면을 끓여 먹었던 가스버너와 냄비도 놓여 있다. 옆 블록으로 화장실 구역도 나눠놨다. 수십차례에 걸쳐 절도 행각을 벌이고도 귀신같이 사라져 경찰의 골치를 썩였던 절도범 김모(40)씨의 은신처다.

상습절도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고가도로 철골구조물 내부. [사진 광산경찰서]

상습절도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고가도로 철골구조물 내부. [사진 광산경찰서]

김씨는 약 5년 전 길을 걷다 우연히 보게 된 고가도로 아래 환기 구멍을 통해 철골 구조물 내부로 들어가 은신처로 삼았다. 직업이 없었던 김씨는 철골 구조물에 살면서 이곳을 거점 삼아 금품을 훔쳐 생계를 이어갔다. 김씨는 고가도로 은신처에 머무는 동안 절도 행각을 벌이다 경찰에 붙잡혀 2차례 교도소에 수감됐지만 출소하면 고가도로 은신처로 돌아왔다. 친인척도 있었지만, 고가도로 은신처를 고집했다.

상습절도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고가도로 철골구조물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 [사진 광산경찰서]

상습절도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고가도로 철골구조물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 [사진 광산경찰서]

김씨는 지난 4월부터는 광주 광산구 우산동, 신가동 일대에서 동전교환기 등을 부수고 현금을 훔쳤다. 근처 주거용 비닐하우스에서는 옷과 식료품 등 생필품을 훔쳐 은신처로 돌아왔다. 김씨는 돈이 생기면 모텔에 묵으면서 몸을 씻고 더러워진 옷을 세탁했지만 이후 고가도로 은신처로 돌아왔다.

상습절도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고가도로 철골구조물 외부. [사진 광산경찰서]

상습절도 혐의로 체포된 김모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고가도로 철골구조물 외부. [사진 광산경찰서]

김씨는 자신이 범행했던 곳을 다시 찾아 금품을 훔쳤다. 경찰은 비슷한 범행 수법과 장소, 폐쇄회로TV(CCTV)를 이용해 40대 초반 남성, 더벅머리, 빨간 프로야구 모자, 회색 상의 등 유력한 용의자 김씨의 인상착의도 확인했지만, 그는 어느 순간 귀신처럼 사라졌다. 김씨가 머물던 고가도로 은신처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할 방패막이였다.

5년 전부터 교도소 들락거리면서 고가도로 은신처 생활 #경찰 수사망 피하려고 촛불·모기향도 피우지 않고 살아

경찰은 같은 장소에서 금품을 훔치는 김씨의 범행 수법에 맞춰 지난 8월부터 과거 범행 장소를 중심으로 잠복수사에 돌입했다. 추석에도 잠복을 멈추지 않았다. 명절에는 경찰이나 가게 주인들의 감시가 허술해질 것이라 생각할 김씨를 노렸다.

경찰은 지난 14일 오전 1시 40분쯤 광주 광산구의 한 세차장에서 돈을 훔치는 김씨를 붙잡았다.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김씨로부터 "고가도로 내부 철골 구조물에서 살았다"는 진술을 듣고 그가 감쪽같이 사라졌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씨는 고가도로 은신처에서 전등은 물론 촛불도 켜지 않고 어두컴컴한 채로 생활했다. 한여름에 모기가 수없이 물어뜯어도 모기향도 피우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심야에만 은신처 밖으로 나섰고 자전거를 타고 CCTV가 드문 광주천변을 따라 이동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고가도로 내부가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라 생각해 은신처로 삼았고 불빛에 들킬까봐 모기향도 피우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의 주거지가 특정되지 않은 탓에 광주 외부에서 노숙하며 시내로 진입했을 것으로 추측했는데 그런 절묘한 지점에서 머물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고가도로 은신처를 중심으로 확인된 범행만 34차례에 걸쳐 423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것으로 파악됐다. 광주에서 훔친 돈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 버스를 타고 전남 순천까지 이동해서 썼다. 경찰은 김씨를 상습절도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고가도로를 담당하는 관할 기관에 김씨의 은신처를 알려 원상복구를 요청할 계획이다.

광주광역시=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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