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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파스로 중풍 예방?” 쇼닥터 금지법에도 논란 끊이지 않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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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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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허모(42ㆍ경기 수원시)씨는 이번 명절에 고향집을 찾았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70대인 허씨의 노부모는 하루에도 몇번씩 목덜미에 물파스를 발랐다. 허씨는 “두 분이 근육통이 심해서 그러나 싶어 ‘왜 물파스를 자꾸 바르시냐’고 물었더니 ‘중풍(뇌졸중)에 안걸리려고 그런다’고 하시더라. 말도 안된다고 말씀을 드려도 TV에 나온 유명한 의사가 알려준 비법이라면서 철썩같이 믿고 계시는데 어이가 없고 화가 난다”라고 말했다.

허씨의 부모가 몇달째 실천해오고 있는 ‘물파스 중풍 예방법’은 지난 3월 한 종합편성채널의 건강정보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의사 이모씨는 “뒷목에 바람잡는 혈이 있는데 이곳에 아침ㆍ저녁으로 물파스를 발라주면 중풍이 예방된다”고 설명했다. 이씨가 다른 출연자의 목에 물파스를 바르는 시연을 하고, 이 출연자가 “코가 뻥 뚫리고 눈이 커진다”고 말하는 장면도 그대로 방송됐다. 최근 동료 한의사가 이에 대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나서면서 ‘쇼닥터’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쇼닥터란 방송 등에 출연해 의학적 근거가 뚜렷하지 않은 치료법을 제시하는 일부 의사ㆍ한의사를 말한다.

한의사 유튜버인 ‘페인랩’은 지난달 29일 ‘한의사 이OO 선배님 제발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이씨를 비판했다. 페인랩은 “예능과 정보 채널을 넘나들면서 활약하는 ‘쇼닥터’ 한의사 중 넘버원이 있다”며 이씨를 지목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예능감도 있는 데다 방송사 입장에서 시청률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들을 많이 해주니 방송가에서 인기가 많을 만하다”면서 “그런데 요즘 들어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적어도 의료인이라면 최소한의 정도를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의사 이씨가 방송에서 소개한 중풍을 예방하는 물파스 사용법과 팔을 수평으로 뻗은 뒤 체질에 안 맞는 약재가 몸에 닿으면 팔이 내려간다는 CRA 테스트를 과장 사례로 들었다. 김계진 대한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이론을 과도하게 넓게 해석한 것이다. 한의학에서 정말 미미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보편적인 치료법과 거리가 멀다”며 “환자들 입장에서 쇼로 보고 넘기기 어렵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환자들이 방송을 본 뒤에 한의원을 찾아가서 ‘유명한 한의사가 이러더라’며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협회 입장에서도 난감하다.”라고 말했다.

쇼닥터는 의료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돼 왔다. 의학정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건강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전하는 것은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전문가로서 신뢰받는 의료인들의 말은 대중의 뇌리를 파고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범조 서울시보라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쇼닥터들은 술자리에서 친구들하고 농담으로나 할 이야기를 TV에 나와서 한다. 그런 근거 없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환자들에게 혼란을 준다. TV에서 봤다면서 ‘귓볼에 주름이 잡혀있으면 심장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데 봐달라’ ‘머리에 열이 많은데 나도 대머리가 될 가능성이 높냐’고 묻기도 한다”고 전했다.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의사 이모씨는 ’뒷목에 바람잡는 혈이 있는데 이곳에 아침ㆍ저녁으로 물파스를 발라주면 중풍이 예방된다“고 설명했다가 동료 한의사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의사 이모씨는 ’뒷목에 바람잡는 혈이 있는데 이곳에 아침ㆍ저녁으로 물파스를 발라주면 중풍이 예방된다“고 설명했다가 동료 한의사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의사 이모씨는 ’뒷목에 바람잡는 혈이 있는데 이곳에 아침ㆍ저녁으로 물파스를 발라주면 중풍이 예방된다“고 설명했다가 동료 한의사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의사 이모씨는 ’뒷목에 바람잡는 혈이 있는데 이곳에 아침ㆍ저녁으로 물파스를 발라주면 중풍이 예방된다“고 설명했다가 동료 한의사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최근에는 방송 출연을 계기로 영리를 취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의사ㆍ한의사가 건강기능식품의 장점을 소개한 뒤 홈쇼핑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품을 판매하는 식이다. 산부인과 전문의 A씨는 과거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난임 환자가 유산균을 꾸준히 먹고 한 달만에 임신이 됐다”고 말했다. A씨는 홈쇼핑에 출연해 유산균 등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5년 의료법 시행령을 개정해 ‘쇼닥터 금지 조항’을 담았다. 의료인이 신문ㆍ방송을 통해 건강ㆍ의학정보를 과장하거나 가짜로 전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최대 12개월의 자격정지 처분을 내린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규정에 따라 자격정지 당한 의료인은 2명 뿐이다.

복지부가 직접 모니터링하지는 않는다. 손호준 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장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모니터링 과정에서 적발해 복지부에 행정처분을 의뢰하면 사실 확인을 거쳐 처분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의협ㆍ한의협 등 전문가 단체는 2015년부터 협회 차원에서 자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쇼닥터들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김대하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협회 차원에서 자정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징계가 회원 자격 정지 정도라 실효성이 없다. 의협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자격정지 등 징계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일학 연세대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다보니 쇼닥터가 끊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헛소리 했다가는 자격이 날아간다는 인식이 퍼져야 근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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