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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여도 안 돼" 아빠는 반대하지만...크리스티는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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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가 된다면요? 그래도 테니스 선수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피부가 검게 그을릴 만큼 뛰어다니는 게 안쓰러워서요."

올해 US오픈에서 16강에 올라 돌풍을 일으킨 재미 교포 크리스티 안(27·미국·93위·한국명 안혜림)의 아버지 안동환(60)씨의 입장은 확고했다.

17일 코리아오픈 1회전에서 공격하고 있는 크리스티 안. [사진 코리아오픈 조직위원회]

17일 코리아오픈 1회전에서 공격하고 있는 크리스티 안. [사진 코리아오픈 조직위원회]

크리스티는 1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코리아오픈 테니스 대회 첫날 단식 본선 1회전에서 티메아 바친스키(30·스위스·94위)를 56분 만에 세트 스코어 2-0(6-0 6-0)으로 완파했다.

크리스티는 경기 후 "투어 대회를 뛰면서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이긴 건 처음이다. 나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면서 "나 스스로도 정말 잘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그라운드 스트로크도 좋았다. 모든 기술이 잘 들어갔다. US오픈 이후에도 계속 경기력이 좋아서 기쁘다"고 했다.

한국계 미국인 테니스 선수 크리스티 안(오른쪽)과 아버지. [사진 크리스티 SNS]

한국계 미국인 테니스 선수 크리스티 안(오른쪽)과 아버지. [사진 크리스티 SNS]

딸과 함께 한국에 온 안씨는 딸의 경기를 지켜보고 활짝 웃었다. "저희 딸 경기 보셨나요? 정말 잘했어요." 기자를 만나자마자 껄껄 웃으면 기뻐했다. 하지만 딸이 테니스를 하는 건 여전히 반대했다. 세계 1위에 오른다고 해도 지금 당장 테니스를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안씨는 "저도 젊었을 때 테니스를 종종 쳤어요. 운동 신경은 없지만 취미로 좋아했지요. 하지만 오늘 이겼지만 내일 질 수 있는 게 테니스입니다. 지금은 혜림이가 언론의 관심을 받지만 계속 지면 주목받지 못하죠. 땡볕에서 힘들게 운동하는데 부상을 당하면 먹고 살기도 힘들어요. 직업으로서 안정성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는 취미로 테니스를 치던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6세 때 테니스를 시작했다. 16세 때인 2008년에 미국테니스협회가 주최한 내셔널 챔피언십 18세부를 제패했다. 2008년에는 US오픈 예선을 3연승으로 통과해 본선에 올랐다. 키 1m65㎝로 테니스 선수 치고는 작은 키지만 동양인 특유의 순발력과 강한 멘털이 돋보인다. 하지만 부모님은 전문적인 테니스 선수가 되는 걸 반대했다.

안씨는 안정적인 삶을 꾸려왔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인회계사가 된 후,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미국 명문 노스웨스턴대를 나온 큰 아들은 현재 치과 의사다. 안도 역시 명문 스탠퍼드에서 과학기술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안씨는 공부도 잘하는 딸이 조금 더 편안한 길을 가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현재 테니스를 그만둘 마음이 없었다. 그는 "대학에 갔을 때는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했다. 그런데 대학에서 테니스부에서 활동하면서 테니스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테니스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즐겁게 하고 싶다"며 웃었다. 최근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한 후, 실리콘밸리의 한 기업에서 취업 제의를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안씨는 딸의 테니스 선수 활동을 반대하지만 칭찬은 아끼지 않았다. "딸은 발이 참 빨라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서 코트를 커버하는데 멘털이 강해서 부상을 당해도 또 일어선다"며 웃었다. 안씨는 이번 대회에서도 딸의 유니폼을 세탁해주는 등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딸의 꿈을 응원하지만, 부모로서 힘든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안씨의 말과 행동에 담겨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크리스티는 코트에서 집중하고 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결승전까지 올라가서 우승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크리스티의 16강전 상대는 폴로나 헤르초그(슬로베니아·51위)-아나 보그단(루마니아·143위) 경기 승자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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