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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이승엽은 정말 사인에 인색한가, 진실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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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경제 07면

이승엽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팬들에게 십수만 개의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팬 서비스에 인색하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뉴스1]

이승엽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팬들에게 십수만 개의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팬 서비스에 인색하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뉴스1]

2019년 8월 29일, 이승엽(43·이승엽야구장학재단 이사장)은 대구 복현초등학교에서 열린 ‘2019 KBO 찾아가는 야구 교실 티볼 보급행사’에서 참가 학생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행사 직후 그는 길게 늘어선 학생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줬다. 행사와 무관한 어른도 있었다. 이런 행사마다 쫓아와 사인을 받는 이들이다.

팬 서비스 관련 수년째 논란 반복 #“희소성 떨어져” 발언 비난 이어져 #팔기 위한 사인 요청엔 과민 반응 #정중히 해달라면 기꺼이 해줄 것

2007년 10월 29일, 이승엽은 인천에서 한국시리즈 6차전을 관전하다가 푸드코트에서 분식을 먹었다. 당시 수술받은 왼손에 깁스한 상태였다. 불편하게 식사하는 그에게 몇몇 팬이 집요하게 사인을 요청했다. 오른손으로 몇 개를 한 이승엽은 “야구를 봐야 하니까 식사부터 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2017년 은퇴 뒤에도 이승엽은 언제나, 어디서나 사인 요청을 받는다. 만 21세에 홈런왕(1997년 32개)에 올랐고, 23세부터 ‘국민타자’로 불린 그는 한·일 통산 626홈런을 때리는 동안 십수만 번 사인했다. 그런 그에게 ‘비난의 꼬리표’가 붙었다. 사인을 잘 안 해준다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그런 말이 돌았다. 이젠 적지 않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승엽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팬들에게 십수만 개의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팬 서비스에 인색하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뉴스1]

이승엽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팬들에게 십수만 개의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팬 서비스에 인색하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뉴스1]

2015년 이승엽은 한 방송에서 “요즘 사인을 잘 해주지 않았다. 너무 많이 하면 희소성이 떨어진다. 올해부터는 많이 해드리려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선 그에게 사인을 요청했다가 “저리 가라, XX야”라고 욕설을 들었다는 한 소년의 경험담이 퍼졌다. ‘이승엽은 팬을 무시하고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는 두 사례가 복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엽은 평소 팬 서비스가 좋은 편이라, 사실 이런 얘기는 잘 믿기지 않는다. 그에게 직접 물어봤다. 그는 “욕을 했다는 시기가 내 스무 살(1996년 추정) 때라고 한다. 정말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다면 그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소년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 비슷한 사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방송에서 ‘희소성’을 언급한 건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승엽이 팬을 하찮게 생각한다’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문제의 방송만 봐도 답을 알 수 있다. 방송에서 이승엽은 “(사인은) 어린이들에게는 해주려 한다. 소장용으로 사인과 함께 이름을 써달라는 분들에게도 해드린다. (판매 의도가 있어 보이는) 다른 분들에게는 잘 안 해드린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팬들에게 십수만 개의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팬 서비스에 인색하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뉴스1]

이승엽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팬들에게 십수만 개의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팬 서비스에 인색하다는 오해에 시달렸다. [뉴스1]

인터넷을 통해 사인 공을 거래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유명선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간다. 오전에 공항 입국장에서 사인을 받은 뒤, 오후에 다른 행사장에 또 나타나 사인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선수 동선 정보를 공유한다. 이승엽뿐 아니라 많은 스타가 사인과 관련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 대개 이들 때문이다. 이승엽은 “그래도 희소성 얘기를 한 건 내 잘못이다. 말을 조심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1990년대 이승엽은 동료들이 탄 구단 버스를 놓치는 경우가 잦았다. 구장 밖으로 나서면 수백 명의 팬이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모자를 뺏기고, 옷을 찢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구단 직원 자동차로 뒤늦게 이동하곤 했다. 그는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 기간 그런 일이 반복되고, 정도도 심해지다 보니 힘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사과가 변명처럼 들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더 신중하고, 더 겸손하라는 뜻으로 새기겠다”고 말했다.

류현진(32·LA 다저스)도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스프링캠프에서 사인 요청을 거부하고 뛰어가는 모습이 화면이 잡혔다. 평소 팬 서비스가 좋은 류현진은 장난 같던 이 ‘한 장면’ 때문에 수년간 비난에 시달렸다.

팬 덕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건 선수들도 다 안다. 다만 ‘선수’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들도 지치고 힘들 때가 있다. 미국·일본과 달리, 선수와 팬 동선이 많이 겹치는 한국에서는 여러 일이 생기고, 그만큼 오해도 많다. 오늘 길을 가다 우연히 이승엽을 만난다면, 정중히 사인을 요청하시라. 웬만하면 그는 웃는 얼굴로 기꺼이 해줄 것이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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