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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남동생, 설거지는 내가…뭔가 바뀐 것 같다고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빵떡씨의 엄마는 모르는 스무살 자취생활(2)

올해 초부터 서울에 전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동거인은 쌍둥이 동생으로 둘 다 94년생 사회 초년생이다. 동갑내기 90년대 생들이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겪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부모로부터의 독립, 연인과의 동거, 결혼문제 등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편집자>

동생과 나와서 산 지 4개월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부모님은 항상 걱정만 하신다. [사진 빵떡씨]

동생과 나와서 산 지 4개월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부모님은 항상 걱정만 하신다. [사진 빵떡씨]

“얼굴이 어째 더 못 쓰게 됐냐”
주말에 본가에 갈 때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벌써 나와서 산 지 4개월이 다 돼 가는데, 부모님의 말씀대로면 얼굴이 매주 못 쓰게 되어 지금쯤이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곤죽이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엄마·아빠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애초에 어디 쓸 얼굴은 아니었어….”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모님은 자기 자식에 한정되어 ‘저번 주보다 더 말라 보이는’ 착시현상을 평생토록 경험하고 계신다. 실제로는 나와 동생 둘 다 독립할 때보다 약 3kg씩 더 쪘다. 그도 그럴 것이 본가에 올 때마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 보내는 반찬만 다 먹어도 삼시 네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름진 것도 야무지게 먹어서 얼굴엔 번들번들 광이 날 지경이다.

엄마·아빠의 걱정은 할머니에 비하면 아주 약과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는 순간부터 그 연세에도(올해로 91세시다) 고함을 치기 시작하신다.

“아이고! 야들은 피죽도 못 얻어 먹고 댕기나보네? 야들 저녁에 닭이라도 믹이라 으이? 저거 손모가지 얇아서 어따 쓰노. 배가 부르긴 뭘 불러 고까지꺼 먹고!”

호통을 시작으로 나와 동생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먹어야 한다. 웬 가정집에 먹을 건 그렇게 많은지 밥부터 간식, 과일까지 위장행 특급열차를 타려고 줄줄이 기다리는 것 같다.

할머니댁에 가면 항상 이런저런 반찬들부터 간식, 과일까지 자꾸 무언갈 먹이려 하신다. [사진 빵떡씨]

할머니댁에 가면 항상 이런저런 반찬들부터 간식, 과일까지 자꾸 무언갈 먹이려 하신다. [사진 빵떡씨]

나와 동생이 주 중에 하는 일이라고는 사무실에서 키보드나 달칵달칵 두드리는 것밖에 없는데, 할머니는 거의 태릉선수촌 선수들처럼 먹이고 싶어 하신다. 여름엔 더우니까 보양을 시켜야 한다, 겨울엔 추우니까 보양을 시켜야 한다…. 봄엔 미세먼지가 많으니 보양을 시켜야 한다고 하실 판이다. 두툼한 손모가지로 고봉밥을 입에 퍼 넣던 나와 동생은 도대체 얼마나 더 우람해져야 할머니를 만족하게 할 수 있을지 아득해질 뿐이었다.

엄마·아빠의 상상은 언제나 극단적인 데가 있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귀찮아서 밥에는 손도 안 대고 아사 직전에 이르러서야 피자 같은 것을 시켜 명을 유지한다고 생각하신다. 그러나 나와 동생은 먹는 걸 귀찮아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퇴근 한 시간 전부터 카톡으로 저녁은 뭘 먹을지 토의하고, 밤에 침대에 누워서는 아침에 뭘 먹을지 생각하다 잠이 든다. 그러니 부모님은 자식들의 영양실조보다는 비만을 걱정하시는 게 합리적이다.

특히 동생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끼니마다 장조림이나 찌개, 계란말이 등을 만들어 상에 올린다. 나는 데굴데굴 굴러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밥을 떠먹기만 하면 된다. 아마 부모님은 누나인 내가 끼니를 준비하고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그림을 상상하며 우리를 함께 독립시키셨을 텐데, 현실은 전혀 반대로 굴러가고 있다. 이런 실상을 들으면 할머니는 기함하신다.

“집에 반찬 좀 남아 있냐?”
“몰라 석구가 알걸.”
“너는 왜 몰라! 냉장고는 열어 보지도 않는구나!”
“그럼 그럼.”
“그럼 그럼은 무슨! 여식 애가 살림도 좀 할 줄 알아야지!”
“주방은 석구 담당이야.”
“어째 너네는 거꾸로 사냐 그래!”

거꾸로 산다는 것은 여자가 주방 일을 안 하고 남자가 한다는 뜻이다. 그런 시대를 살아오셨으니 그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알겠어요. 할머니!”하고 집에 가선 여전히 요리를 안 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동생은 음식을, 할 줄 모르는 나는 설거지를 맡아서 하고 있다. [사진 빵떡씨]

요리를 좋아하는 동생은 음식을, 할 줄 모르는 나는 설거지를 맡아서 하고 있다. [사진 빵떡씨]

나와 동생은 애초에 가사분배를 할 때 ‘여자니까 이 일을 맡고, 남자니까 이 일을 맡자’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보증금에서 3천만 원을 냈고, 네가 천만 원을 냈으니 집안일은 네가 더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동생이 “어긋난 자본주의”라며 강하게 저항해 무산되었다. 둘 다 직장을 다니고, 퇴근 시간이 비슷하니 가사의 양은 비슷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나는 동의했고, 결국 서로 잘하는 일을 하기로 타협을 봤다.

요리하길 좋아하는 동생은 음식을 만들고, 요리할 줄 모르는 나는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힘센 동생은 여기저기 박박 닦아야 하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는 그 외의 곳을 청소하기로 했다. 세탁과 분리수거는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이긴 내가 세탁을 하고 진 동생이 분리수거를 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이 규칙을 어떻게 보시든, 우리는 우리에게 잘 맞는 방식으로 살 뿐이다. 그리고 꽤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잘 안 되는 부분도 있긴 하다. 정기적으로 식기 건조대의 물을 비우는 일, 널어놓은 빨래를 제때 걷는 일, 화장실에 물때가 끼기 전에 청소하는 일, 나무 도마를 잘 말리는 일…. 독립하기 전엔 일거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의외의 복병이었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한 인터뷰어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사람을 인터뷰했다. 인터뷰어는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물었다. 모두 타들어 가듯 뜨거운 햇볕이나 죽을 것 같은 목마름, 체력고갈 같은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답변은 ‘신발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알갱이’였다. 때로는 거대한 무언가보다 드러나지 않는 소소한 것들이 사람을 지치게 하곤 한다.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집안일들의 고충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진 빵떡씨]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집안일들의 고충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진 빵떡씨]

나와 동생 역시 주기적으로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에 약했다. 독립하기 전엔 엄마가 다 해주던 일이었다. 나가 살지 않았다면 식기 건조대에 물이 고이는 줄 모르고, 화장실에 끼는 물때가 분홍색인 줄 모르고, 나무 도마를 한쪽으로만 기울여 두면 물기가 아랫부분으로 몰려 곰팡이가 생기는 줄 몰랐을 것이다. 독립하고 나서야 부모의 보이지 않는 고생까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부모님들은 고마운 것도 모르는 자식새끼를 굳이 오래 끼고 살 필요 없이 빨리 내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한 번은 이런 얘기를 엄마에게 했다.

“엄마, 석구랑 나는 엄마가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깨달았어. 어때, 독립시킨 보람이 있지 않아?”
“딸, 고생하는 거 몰라줘도 엄마는 우리 딸이랑 계속 같이 살고 싶은데?”

엄마의 답변에 뭔가 크게 불효자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나이가 들어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될까. 나는 조금 망연자실해졌다.

빵떡씨 직장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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