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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차라리 자연재해였다면…" 머나먼 포항 지진 특별법

중앙일보

입력

정치권, 법안 내용 논의는 뒷전, 절차와 형식 논쟁으로 허송세월

포항 지진 특별기획 - 심층분석

신속한 피해 복구·보상 위한 유일한 해법인데 협상 테이블 구성조차 못 해
‘우선 처리’ 약속 저버리고 정치 공방 빠지면 자동 폐기될 가능성 커

4월 2일 포항시 북구 덕산동 육거리에서 열린 ‘포항 지진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범시민 결의대회’에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결의대회에는 예상인원을 뛰어넘어 1만 명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 사진:연합뉴스

4월 2일 포항시 북구 덕산동 육거리에서 열린 ‘포항 지진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범시민 결의대회’에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결의대회에는 예상인원을 뛰어넘어 1만 명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 사진:연합뉴스

2017년 11월 15일 포항 지진이 발생한 지 햇수로 3년, 만 2년째가 되어 가지만 피해 복구와 보상 등 후속조치는 더디기만 하다. 당초 자연재해로 여겼다가 정부조사연구단의 조사 결과 지열발전소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자연지진이 아닌 유발(촉발)지진으로 확인되면서 피해 보상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간 정부와 포항시 등은 자연재난을 기준으로 피해 규모를 산정하고 피해자들을 지원했다. 그런데 손해의 책임을 물을 대상이 나타나면서 민사의 영역으로 바뀐 것이다.

주요 원인 제공자는 지열발전소 운영업체인 넥스지오다. 정부조사연구단은 발전소 가동 과정에서 몇 차례 지진의 징후가 있었는데도 업체가 이를 무시하고 물 투입 등 무리하게 가동해 지진을 유발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국책사업인 만큼 사업 진행 상황을 감독했어야 할 관련 기관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지열발전사업에는 포스코(지상 플랜트 설계·건설), 한국지질자원연구원(미소진동 계층시스템 구축과 모니터링 기술 개발), 서울대학교(수리자극과 효율 극대화 모델 제작), 한국건설기술연구원(시추 최적화 방안)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 피해 규모가 업체의 지불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포항시와 ‘포항 11·15지진 주민공동대책위원회’ 등에 따르면 유발지진으로 확인되기 전에 집계한 피해액은 재산상 직접 피해만 846억원이었다. 여기에 관광객 감소 등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을 더한 추정액은 3323억원에 이른다. 정신적 피해나 부동산 가치 하락 등의 간접 피해 규모는 정확한 산출조차 어렵다. 주민대책위는 간접피해를 더하면 최소 5조원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들이 넥스지오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통해 받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넥스지오는 2001년 8월 자본금 1억원으로 설립됐다. 지진 발생 2개월 전인 2017년 9월에도 15억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지진 발생 이후 발전소 가동이 중단됐고, 서울회생법원으로부터 회생 절차를 밟고 있다. 현재로선 회생보다 청산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법조인들은 주민들이 넥스지오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방법이 사실상 전무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무겸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 변호사는 지난 7월 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1·15 포항지진 특별법과 피해배상을 위한 포럼’에서 “다수 국민이 피해를 입은 대규모 재난인 데다, 특히 정부가 개입되어 있는 사건에서 일반 민사소송 절차는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 방법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가해자 있는데 보상 막막… ”차라리 자연재해였으면"

7월 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포항 지진 특별법 포럼에서 이강덕 포항시장과 서재원 시의회 의장, 이대공·공원식 범시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이 전문가 발표를 듣고 있다. / 사진:전민규 기자

7월 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포항 지진 특별법 포럼에서 이강덕 포항시장과 서재원 시의회 의장, 이대공·공원식 범시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이 전문가 발표를 듣고 있다. / 사진:전민규 기자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다. 소송을 통해 피해 구제를 받으려면 우선 국가와 공무원의 과실이 입증돼야 한다. 소송을 제기하는 주민들이 피해를 입증해야 한다. 지난 3월 20일 정부연구조사단의 조사 결과 발표 직후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피해 배상 방안에 대한 질문에 “국가 등을 피고로 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이후 정부 입장은 달라진 게 없다.

일반적으로 민사소송은 몇 년이 걸릴 지 예측할 수 없다. 포항 지진처럼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사건에는 수백 가구에 대한 감정절차가 진행돼야 하는데 시간과 비용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또 정부조사연구단의 조사 결과 지열발전소에 의한 촉발지진으로 드러났다 해도 이것을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김무겸 변호사는 “지진이 발생한 지 이미 2년 가까이 지났는데, 피해 회복을 위한 소송 때문에 앞으로 수년이 더 소요된다면 신속한 피해 회복이라는 취지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피해를 가중시키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승태 법무법인 ‘도시와사람’ 대표 변호사도 “포항 지진은 광범위하고 피해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재산피해가 발생해 민사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민사소송의 부적합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7년 이상 장기간 이어진 국책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인재(人災)라는 점, ▷대규모 소송이 산발적으로 전개될 경우 법원마다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는 점, ▷국가가 나서지 않음으로써 피해 보상이 지연되면 결국 주민들에게 불이익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 등이다.

결국 해법은 하나로 모아진다. 포항지진 특별법 제정이다. 정치권에서도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에 이견이 없다. 현재 산자위에 접수된 특별법안은 김정재 자유한국당 의원과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 홍의락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4건이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지진 원인에 관한 진상 조사와 피해 배상·보상에 관한 게 법안의 뼈대다.

내년 되면 총선 체제, 처리 시간 빠듯해

지진으로 인해 전손 판정을 받은 포항시 흥해읍 대성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떠난 뒤 철문을 굳게 닫은 채 재건축이 이뤄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진으로 인해 전손 판정을 받은 포항시 흥해읍 대성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떠난 뒤 철문을 굳게 닫은 채 재건축이 이뤄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법 제정을 생소하게 볼 일도 아니다. 인재로 발생한 재난사고 수습과 피해 복구를 위해 특별법을 만든 전례는 많다. 대표적으로는 2008년 3월에 제정된 태안유류오염사고에 관한 특별법인 이른바 ‘허베이특별법’이 있다. 이 법에 따라 정부는 국무총리실에 유류오염사고특위를 설치하고 손해 보전과 환경복원, 피해지역 지원 업무를 진행했다.

피해자가 손해배상금이나 국제기금의 보상금을 받기 전에 대위권 행사를 전제로 국가가 선지급하도록 했다. 또 재판기간의 특례를 규정해 신속한 재판이 가능토록 했다.

4·16 세월호 참사도 특별법을 제정해 피해를 복구한 경우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선박 관리 주체인 청해진해운과 사주인 유병언 일가에게 있었으나, 피해 구제 및 지원 특별법을 근거로 국가가 우선 피해 보상을 진행했다.

포항 지진 특별법안이 산자위에 접수된 건 지난 4월 1일이었다. 지진 발생 직후 포항을 방문한 여·야 지도부는 특별법 제정을 우선 법안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법안이 발의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심사일정도 잡지 못한 상태다. 지난 4월 선거제와 검찰개혁 법안의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을 두고 석 달 동안 국회 운영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8월 초 추경을 위해 국회가 정상화됐지만 이번에는 포항지진 문제를 다룰 소관 문제로 민주당과 한국당 의견이 엇갈렸다. 민주당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특별법안을 다루자는 입장이다. 여러 부처가 관련된 사안이니 산자위에서 다루기에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특위를 구성할 경우 법안 처리와 피해 복구 지원에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게 민주당의 판단이다. 조정식 정책위 의장은 지난 7월 30일 포항 범시민대책위 관계자들을 만나 “상임위(산자위)에서 각 부처 공무원을 불러 특별법을 심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특위를 구성해 심의하는 것이 가장 실효성 있는 방안이자 민주당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반면 한국당은 특별법 제정이 우선이라며 맞선다. 한국당은 산자위 내 특별법안만 다룰 ‘소(小)소위’를 구성해 빠른 처리를 강조하고 있다. 공원식 주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절차상의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신속히 복구하겠다던 포항시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20대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 들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전 국민적 요구사항이었던 세월호 특별법의 경우 2014년 7월에 입법청원되고도 국회를 통과해 시행(2014년 11월 19일)되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오는 12월 정기국회가 끝나면 내년 4월 21대 총선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산자위에 회부돼 있는 주요 쟁점법안은 600건에 달한다. 우선 처리 법안으로 지정되지 않는다면 심의조차 못하고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포항 지진 특별법 제정에 남아 있는 유효한 시간은 올해 말까지인 셈이다. 오는 11월이면 포항 지진은 발생 3년을 맞는다.

특별법이 제정되더라도 여·야 간 정쟁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손해배상 등 민사상 책임을 묻기 위해선 형사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감사원이 진행 중인 감사 결과에 따라 지열발전 사업 관련자에 대한 고발과 수사 의뢰가 뒤따를 전망이다. 이때 대상과 범위를 두고 여·야가 책임공방에 빠질 공산이 크다.

‘진상조사 책임공방 흐를까’ 정치적 셈법에 공방 예고

임시 구호소가 마련된 포항시 흥해체육관에서 거주하는 이재민들이 TV를 시청하고 있다. 구호소 생활이 장기화하면서 시민들이 지쳐 가고 있다.

임시 구호소가 마련된 포항시 흥해체육관에서 거주하는 이재민들이 TV를 시청하고 있다. 구호소 생활이 장기화하면서 시민들이 지쳐 가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선 포항 지진의 원인인 지열발전 사업이 이명박 정부 때 본격적으로 추진됐다는 점을 들어 보수 정권의 ‘적폐’로 보고 있다. 정부조사 결과 발표 직후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지열발전소 사업은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을 목적으로 추진했다”며 “사업 추진 1년 전 스위스 지열발전소가 지진 유발 논란으로 폐쇄됐는데도 왜 MB 정부가 막무가내로 사업을 추진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같은 당 송갑석 의원도 국회 본회의에서 “2015년 이후 여러 차례 위험징후가 발견됐지만, 안전기준은 오히려 완화됐다”며 “이 시기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2016년”이라고 발언해 한국당의 반발을 샀다. 이에 맞서 김정재 의원은 “물을 주입해서 땅을 흔든 게 지진의 원인이 됐다는 게 연구진의 최종 결론”이라며 “그렇다면 마지막인 4차, 5차 물 주입이 진도 5.4 지진의 직접적 원인이 된 건데, 이는 현 정부 출범 뒤인 2017년 8월”이라고 반박했다.

누구의 책임이냐를 놓고 공방전이 펼쳐질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복구와 보상이 늦어지면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차라리 가해자 없는 자연재해였다면 상처도 덜했을 것”이란 분노 어린 넋두리가 주민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다.

지진으로 주택이 파손된 이재민은 2000명이 넘는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선 포항시민은 3만 명에 육박한다. 여기에 더해 3만 명이 추가 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는 포항시 인구(50만여 명)의 10분의 1을 넘는 규모다. 주민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여·야가 정치적 책임공방에 빠지지 말고 민생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머리를 맞대라는 것이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정부조사단 발표 이후 정부의 즉각적인 사과와 피해배상을 기대했던 포항시민들은 정부와 국회의 소극적인 대처로 지진 당시 입었던 정신적·경제적 고통보다 더 큰 상처를 받고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무겸 변호사는 “특별법의 기본 취지는 피해 주민들이 보다 일찍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지역공동체의 회복을 앞당기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봉기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주민들은 즉각적인 법적 대응을 자제하고 1년 8개월간 인내심을 갖고 정부와 국회의 성의 있는 조치를 기다렸다. 이제 그동안 미뤄 왔던 특별법 제정을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 국책사업으로 인한 피해 대책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

글 -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사진 -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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