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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수비 시프트와 손실회피 편향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9일(한국시각)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 더그아웃에서는 황당한 싸움이 벌어졌다. 왼손 투수 리차드 블라이어와 호세 플로레스 수비코치가 말싸움을 벌이다 격투 직전까지 간 것이다.

MLB서 투수와 수비코치 '격돌' #동료끼리도 시프트 찬반 논쟁 #투수들, 이익보다 손해에 민감 #성공률 낮은 다저스에게 '숙제'

볼티모어 투수 리처드 블레이어. [AP=연합뉴스]

볼티모어 투수 리처드 블레이어. [AP=연합뉴스]

블라이어는 5회 등판해 아웃카운트 1개를 잡은 뒤 4연속 안타를 맞고 3실점했다. 그리고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 플로레스와 싸움이 붙었다. 미국 문화에서는 선수와 코치·감독이 언쟁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볼티모어처럼 성적(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최하위)이 나쁘면 더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갈등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투수가 감독 또는 투수코치가 아닌 수비코치와 싸웠다. 블라이어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쟁의 이유를 수비 시프트(defensive shift)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절망감이 끓어오른 것 같다. 내 생각에 안타가 된 타구는 수비 위치 때문에…"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수비 시프트는 타자와 상황에 따라 수비수를 이동하는 작전이다. 류현진(32·LA 다저스) 중계를 통해 자주 보는 것처럼 메이저리그에서 유행하다시피 하는 현상이다. 타자의 타구 방향을 분석, 수비수 전체 또는 일부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한다. 정상 수비라면 안타가 될 타구를 잡겠다는 수비 전략이다.

지난해 다저스가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시도했던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 [MLB닷컴 캡처]

지난해 다저스가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시도했던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 [MLB닷컴 캡처]

수비 시프트는 2014년 이후 급격하게 늘어났다. 올 시즌 전체 타석의 30% 이상에서 수비 시프트가 이뤄진다. 그럴수록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겨울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수비 시프트 금지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야구 룰은 투수와 포수의 위치만을 규정하고 있는데, 내야수와 외야수의 위치 선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만프레드 커미셔너가 수비 시프트를 반대하는 이유는 경기 시간 단축과 득점력 향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수년째 찬반 양론이 대립하고 있다.

시프트를 걸면 수비수들이 이동하느라 경기 시간이 길어진다. 또 시프트 성공률이 높아지면 득점력이 낮아져 팬들이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는 게 시프트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반대로 전략의 다양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수비 측에서) 시프트의 효용과 재미를 지지한다.

그러나 투수와 수비코치의 갈등은 수비 시프트에 대한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줬다. 같은 목적(실점 억제)을 갖고 있는 동료가 싸울 만큼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블라이어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시프트 때문에 (아웃이 될 타구가) 안타로 둔갑했다'고 상당히 많은 투수들이 생각한다.

메이저리그를 중계하는 김병현 MBC스포츠 해설위원은 중계를 "시프트를 보면 야구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민철 MBC스포츠 해설위원도 "정상 수비라면 잡힐 타구가 안타가 되면 투수가 느끼는 부담은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투수 출신들은 대부분 시프트에 반대한다.

김현수가 볼티모어에서 뛰었던 2016년 4월 11일, 안타성 타구를 날렸지만 외야쪽으로 깊숙히 위치를 잡은 탬파베이 2루수에게 잡히고 있다. [그래픽=홍성준 기자]

김현수가 볼티모어에서 뛰었던 2016년 4월 11일, 안타성 타구를 날렸지만 외야쪽으로 깊숙히 위치를 잡은 탬파베이 2루수에게 잡히고 있다. [그래픽=홍성준 기자]

지난 5월 23일 다저스의 베테랑 투수 리치 힐(39)은 탬파베이 최지만에게 번트 안타를 맞고 불같이 화를 냈다. 좌타자 최지만의 타구 데이터에 따라 다저스 내야수들이 대거 우측(1루쪽)으로 이동하자, 최지만이 텅빈 3루 공간으로 기습 번트를 성공한 것이다.

힐은 감독이나 코치와 싸우지 않았지만 혼자 욕설은 내뱉으며 화를 냈다. 그는 "시프트가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할 때는 정말 화가 난다"고 말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심리를 손실회피(loss aversion) 편향이라고 부른다. OX 퀴즈에서 이기면 1만원을 받고, 지면 5000원을 잃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확률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어도, 인간은 이익보다 손실에 더 민감하다는 이론이다.

손실회피 편향을 야구에 적용하면 어떨까. 한 시즌에 수비 시프트 덕분에 안타 20개를 덜 맞고, 시프트로 인해 아웃이 될 타구 15개가 안타로 둔갑한다 해도 대부분의 투수들은 이를 싫어한다. 시프트 덕분에 막은 안타는 잘 잊지만, 시프트 탓에 맞은 안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프트가 수비측에, 즉 투수에게 이익이라는 가설은 맞는 것일까. 메이저리그의 여러 통계와 자료를 분석하면 그건 확실치 않다. 시프트를 걸었을 때 타율이 다소 낮아지긴 하지만, (타자들이 타구를 띄우려고 더 노력하기 때문에) 장타율이 되레 높아지기도 한다.

보스턴의 거포 데이비드 오티스(은퇴)처럼 극단적으로 당겨치는 좌타자에게는 시프트가 특히 많이 걸린다. 내야수 4명이 모두 1루와 2루 사이에 포진하기도 했다. 오티스가 공간이 넓은 좌익수 쪽으로 툭 밀어치기는 단타를 때렸다면? 기록은 시프트의 실패다. 그러나 수비측은 장타를 맞지 않았기에 성공으로 여길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수비 시프트를 '과학적' 전략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그 근거가 투수의 '감정적' 동요를 막을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올 시즌 다저스 시프트를 보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저스는 야수의 포지션 이동이 잦다.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을 맡을 때 시프트 성공률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5일 보스턴전에서 류현진은 1회 안타 5개를 내주며 2실점(당시 자책점으로 기록됐다가 나중에 비자책점으로 정정) 했다. 이 가운데 3개가 시프트 때문이었다. 2루수가 유격수 위치에서 땅볼을 잡았으나 2루에서 공을 잡아줄 수비수(피봇맨)가 없어 병살 기회를 날리기도 했다.

이런 경우, 투수의 손실회피 편향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 다툼에서 감독·코치를 이긴 투수는 없었다. 특히 로버츠 감독은 논쟁적인 상황을 능구렁이처럼 잘 넘긴다. 힐이 시프트 때문에 욕설을 한 날, 로버츠 감독은 "힐의 패스트볼 커맨드가 아주 좋았다"고 눙쳤다.

류현진은 모법 답안을 알고 있다. 그는 7월 15일 경기 후 "야구를 하다 보면 (시프트 실패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빗맞은 안타는 신경 쓰지 않는다. 팀이 이겼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류현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다.

당시는 류현진의 피칭이 최고조의 올랐을 때여서 더 의연했을 수 있다. 평균자책점 타이틀이나 사이영상 수상이 걸린 등판에서도 류현진이 평정심을 잃지 않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다저스 수비가 더 튼실해지기를 바란다.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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