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들 만나면 뭐라고 하지?” 추석이 걱정되는 퇴직자들

중앙일보

입력 2019.09.14 09:00

[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54)

 명절이 즐겁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퇴직자도 그 중 하나다. 서울역을 찾은 귀성객들 모습. [중앙포토]

명절이 즐겁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퇴직자도 그 중 하나다. 서울역을 찾은 귀성객들 모습. [중앙포토]

이현성 씨(54)는 유독 이번 추석이 반갑지 않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재개발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업무를 했으며, 바쁜 와중에도 대학원에 진학해 꾸준히 자기계발을 해 왔고, 회사 안에서는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3년 전 부장을 마지막으로 원치 않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제일 먼저 실업급여를 신청했고, 이 과정에서 인사혁신처에서 운영하는 ‘나라일터(www.gojobs.go.kr)’를 알게 됐다. 모 공공기관에서 인력개발원장을 모집하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응시자격을 보니 그동안 이씨가 전 직장에서 근무했던 경력과 대학원에서 HRD와 관련해 공부했던 것이 딱 맞아 떨어졌다.

고용센터에 근무하는 직업상담사의 도움을 받아 이력서를 작성했고, 본인의 경력을 자기소개서에 자세하게 반영했다. 처음 이력서를 작성할 때에는 막막했는데 용기를 내 상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과가 좋게 나왔다. 지원하고 두 달 후 그 기관 인력개발원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임용 기간은 3년의 범위 안에서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민간과 환경이 완전히 다른 공공부문에서 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20여 년 동안 민간부문에서 쌓은 노하우를 성공적으로 접목했고, 성과도 높게 나왔다. 그동안 임용계약은 큰 문제 없이 연장됐고, 올해 임용 기간이 만료되지만 내심 연장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외 없이 원칙이 적용돼, 결국 2개월 전에 두 번째 직장에서도 그만뒀다.

명절에 모인 가족들에게 회사 그만둔 것을 말해야 할지, 집안 어른이나 형제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사진 pixabay]

명절에 모인 가족들에게 회사 그만둔 것을 말해야 할지, 집안 어른이나 형제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사진 pixabay]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 퇴직이니 적응이 될 만도 한데, 도무지 적응되지 않고 하루하루가 힘들다. 남들은 그래도 대기업 퇴직 후 3년이나 더 좋은 회사에서 근무했으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씨는 ‘만일 내가 그때 다른 의사결정을 했으면’,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었던 3년 전에 창업했다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이씨는 아내가 자신에게 무척 신경을 쓰는 것을 느끼고 있다. 두 번째 직장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옆에서 봐왔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추석 준비를 하면서 아내의 짜증이 부쩍 늘었다. 이씨가 장남이기 때문에 추석 명절에 친척 일가가 이씨 집에서 차례를 모시는데, 자연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추석 앞두고 명절 스트레스

막상 이씨 본인도 어머니께 회사 그만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집안 어른이나 형제들의 질문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걱정이 크다. 그러고 보니 회사를 그만둔 상태에서 처음 맞는 명절이다. ‘아니, 직장생활을 할 만큼 한 나도 이렇게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데, 대학 졸업 후 3년째 취업을 못 하는 조카의 마음은 오죽하겠나’라는 생각이 든다.

위 사례자처럼 명절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 많다. 퇴직자도 그중 하나다. 심하면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혼자만의 고치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이 순전히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책한다. 가까운 사람이나 친척들에게 창피를 당한다고 생각하고, 난처한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갖는다.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크다. 이들에게 많은 친척이 모이는 추석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오지랖 넓은 친척이 ‘요즘 회사는 어때?’라고 물어오면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은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도 있다.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은 그동안 집착했던 자신감을 잃으면서 좌절감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실직의 어려움 극복 도와준 아내

대한민국 직장인은 평균 49.1세에 주된 직장에서 퇴직한다. 중요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사진 pixabay]

대한민국 직장인은 평균 49.1세에 주된 직장에서 퇴직한다. 중요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사진 pixabay]

나도 20여 년 전에 명절 연휴 시작되기 전날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다. 연휴를 시작하는 아침에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잘린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 말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차피 해고된 사실은 변함없고, 이 사실을 알려 봐야 명절 분위기만 망칠 거 같아 이야기하지 않았다.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저녁에 가족에게 알렸다가, 아내에게 원망을 많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힘든 일을 왜 당신 혼자 감당했느냐. 가족이면 어려운 것도 함께 걱정하고 극복해야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며 싹싹 빌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아내의 배려가 감사했고, 어쩌면 아내의 그 모습에서 내가 실직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퇴직자는 당당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직장인은 평균 49.1세에 주된 직장에서 퇴직한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잘난 친구와 친척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의 복이라고 생각하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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