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메일이 왔다. 지난 4월13일이었다. 손병욱, 모르는 분이었다. 세계가 초 단위로 엮이는 세상이지만, 직항으로 14시간이나 걸리는 태평양 너머에서 온 소식이라 눈길을 끌었다. 뉴욕 도심에서 오래 일구던 텃밭을 빼앗겼다고 했다. 무슨 곡절인지 궁금했다. 메일과 메신저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뉴요커들의 일상을 볼 수 있었다. 그간 오고간 이야기를 손 선생이 말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젊어서 이민을 가 미국 생활 37년째입니다.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로 일했지요. 뉴욕에서 텃밭농사를 10여년 지었습니다. 뉴욕에는 조그만 텃밭이 100개가 넘습니다. 커뮤티니 가든(community garden), 한국의 주말농장이라고 보면 되지요. 구글로 찾아보니 맨해튼에만 23군데가 있네요. 뉴욕시 공원국 관할입니다. 저는 루스벨트 아일랜드에 살아요. 맨해튼과 퀸즈 사이에 있는 작고 기다란 섬인데 행정구역은 맨해튼 소속이지요. 아마존이 여기로 들어오려다가 반대가 심해 무산됐어요. 우리 동네 커뮤니티 가든에는 밭이 132개예요. 하나가 대략 4×4 미터 정도입니다. 회원제로 운영하는데 1년에 사물함 사용료가 20달러 텃밭 사용료가 40달러이니 거저지요.
텃밭을 얻으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저는 바로 구했어요. 가든 클럽 회장인 론이랑 친한 덕을 봤죠.(가든 클럽은 회원들이 매년 회장과 임원들을 투표로 뽑아요. 뉴욕시 전직 마약담당 형사였던 론은 10년 넘게 회장을 한 뒤 80세가 넘어서야 힘들다며 물러났지요.) 론이 어느 날 너 텃밭하고 싶니? 묻기에, 그래 했더니 마침 나가는 회원이 있다더군요. 나중에 누가 이걸 문제 삼으니 론이 아 그 친구는 3년 전에 리스트에 올려놨다고 했대요. 회장이 어느 정도는 재량권이 있거든요. 대기자가 많아 준회원을 두고 있어요. 정회원의 밭을 같이 가꾸며 회비도 내지요.
여기 사람들은 죄다 꽃만 가꾸고, 다른 것은 기껏해야 토마토나 허브 정도를 심어요. 저는 먹는 채소 위주로 심었어요. 사람들이 보고서 많이 따라하더군요. 한국 오이 모종도 많이 나눠 줬지요. 제가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그랬는지 몇몇이 시기와 모함을 시작했어요. 저랑 친한 유태인 친구를 엮어서요. 여기서 대학 다닐 때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직장이나 사회에서 잘나가면 인종차별이 시작돼요.
새 회장 후보로 카렌과 에이프릴이 나왔어요. 둘 다 여자인데 카렌은 중국계예요.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며 봉사도 많이 했지요. 론을 비롯한 친구들이 카렌을 밀었지만 백인 일색인 회원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회장이 된 에이프릴은 임원들을 주로 자기편 여자들로 채웠어요. 무슨 수단을 썼는지 다 그 앞에서 빌빌대더군요. 아이고~ 동네 텃밭 회장이 무슨 큰 벼슬이라고. 회장이 바뀐 뒤 그 팀이 갑질을 시작했어요.
새 회장이 갑자기 텃밭 앞에 회원들 사진을 걸자고 하더군요. 게다가 음주 금지, 흡연 금지. 출입시간 제한까지 하겠대요. 제가 친구들한테 그랬지요, 아니 얘들이 미쳤나? 여기는 더 이상 아메리카가 아니다. No more free country. 저는 텃밭 가꾸며 다른 사람들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대부분이랑 친했거든요. 어느 날 일을 하고 맥주를 마시는데 여자 몇이 오더니 마시면 안 된대요. 그래서 어이! 우리는 농부가 아니야. 밭일만 끝내고 집에 가는 농부가 아니라고. 이건 내 취미 생활이고 여기는 내 쉬는 공간인데 니가 뭔데 나한테 그래? 저만이 아니라 친구들이 다 열 받았지요.
론이 자기 아파트로 모이자고 했어요. 회칙에 없는데 준회원 에이프릴이 어떻게 회장이 됐지? 무슨 야료가 있는 거 아냐? 이거 안 되겠네…. 방법을 의논했지요. 클럽 임시총회를 열자 회원끼리 설전이 벌어졌지요. 결국 회칙에 따라 에이프릴이 떨려나고 다른 사람을 뽑았는데 그쪽도 에이프릴 일파였어요.
묘한 시기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내 친구 본이 만든 작은 창고가 있어요. 전기를 끌어오고 냉장고도 갖다놨지요. 겨울에는 그 안에서 맥주파티도 하고 노는 방이지요. 이게 잿더미로 변해요. 금요일 밤 11시 반에 불이 났다는데 그 조금 전에 에이프릴이 사는 아파트에서 나가는 게 CCTV에 찍혔대요. 그 여자가 텃밭 옆 야구장 바로 건너에 사니 걸어서 2,3분이면 오지요. 어떻게 된 건지 이 일은 흐지부지 끝납니다. 다친 사람도 없고 얼기설기 지은 창고라서 그랬는지. 그런데 나중에 이 일이 저한테 불똥이 튀어요.
회장이 바뀌었지만 걔네 일당의 시비는 여전했어요. 그런데 유독 나한테만 심하게 굴어요. 그러건 말건 내가 텃밭에서 재미나게 노는 게 얄미웠는지 배가 아팠는지. 하루는 맥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동네 경찰이 와서 잡혀갔어요. 술 마시고 무단침입 했다는 혐의로 티켓을 주더군요. 이건 무조건 법정에 가야합니다.
맨해튼에 있는 법원에 가기 전에 자료를 준비했어요. 뉴욕은 공원이나 길거리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술을 못 마셔요. 판사한테 텃밭 울타리 사진하고 출입문에 자물통이 달려있는 사진을 보여줬지요. 여기는 열쇠를 가진 회원만 출입하는 곳이지 공공장소가 아니다, 난 돈을 내는 정회원이라고 했지요. 무단침입 혐의도 해명했어요.
걔들이 출입허용 시간대를 dawn to dusk 라고 정해놨어요. 일몰(sunset) 시간에서 한 시간 이상이 지나야 dusk예요. 그날 dusk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여줬습니다. 판사가 기각(case dismissed!) 하더니 웃으며, 그래 텃밭에서 뭐를 키우슈? 하고 물어요. 잠시 농담 비슷한 얘기를 하다가 집에 왔지요. 다음에는 온실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어요. 어이, 다른 애도 온실이 있는데? 니 온실은 뭘 키우려는 게 아니라 맥주 마시고 노는 데잖아? 저기 저 구석에 키우는 거 안 보여? 네 밭이나 신경 써, 응? 튀어나오는 욕을 참으면서 최대한 점잖게 말했지요.
그 후로 동네경찰이 두 번 더 왔어요. 한번은 다른 회원들은 놔두고 저랑 다른 친구 하나만 잡아갔어요. 법원에 가니 같은 판사더군요. 지난번과 비슷하게 끝났어요. 마지막은 친구들 셋이랑 넷이 놀고 있을 때였지요. 우리가 뭘 잘못했냐? 무단침입(trespass)이야. 텃밭 문이 잠겨있는데 어떻게 들어왔어? 담 넘어왔어. 그러면 니네가 무단침입 한 거네. 경찰 하나가 당황해 하더니 본부에 무전기로 뭐라 뭐라 해요. 조금 있다가 차가 한대 더 와서 죄다 잡혀갔어요. 거기서 사이좋게 티켓을 한 장씩 나눠받았어요. 누가 신고 했냐고 물었더니 사무실에 정식으로 신청을 하래요. 나중에 사건보고서(incident report)를 받아보니 역시 그쪽 짓이었어요. 신고자, 신고 받은 시간부터 출동시간까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신고한 자가 텃밭회장을 사칭했더군요. 더 말하기 싫었어요. 텃밭 때려치울 거다, 나도 니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했지요.
클럽 회칙에 텃밭을 제대로 관리 안 하거나 잘못을 세 번 이상 하면 퇴출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저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법원에서 다 기각 판결을 받았지만 정나미가 떨어졌어요. 밭 아니라도 할 일 많고 놀 거리도 많거든요. 속이 시원하데요….
(‘뉴욕에서 온 편지’는 2탄으로 이어갑니다. 사진: 손병욱 선생 제공)
무 배추 심고 나니 내 밭에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가을장마에 녹아버린 모종 자리에 20일무 씨앗을 넣었다. 그런데 고라니가 다시 나타났다. 이놈을 어쩐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