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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1000번 읽고서도 왜 모를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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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가 핀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진리를 찾아라. 달을 보기 위해선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라.”

불교 경전의 한 구절이냐고요? 아닙니다. 페르시아의 오래된 속담입니다. “달을 보려면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보라.” 혜능 대사의 일화와도 무척 닮았습니다. 1300년 전입니다. 한 비구니 스님이 『열반경』을 읽다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들고 혜능 대사를 찾아왔습니다. 『열반경』을 내밀며 비구니 스님이 질문을 하자 혜능 대사가 말합니다.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네가 경전을 읽어주면 내가 그 뜻을 일러주겠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이 한 마디 쏘아붙입니다. “아니, 글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경전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혜능 대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달을 보라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 그때 너는 달을 보느냐, 아니면 손가락을 보느냐.”

달을 보기 위해선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 [중앙포토]

달을 보기 위해선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 [중앙포토]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은 동양과 서양, 옛날과 오늘날이 다르지 않습니다. 1300년 전 혜능 때와, 2600년 전 붓다 때와 오늘날의 방법이 똑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1000년 전의 달도 하늘에 있고, 지금의 달도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1000년 전의 진리도 내 안에 있고, 지금의 진리도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속담은 강조합니다.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찾아라”고 말입니다.

저는 목숨을 건 듯이 책 읽는 사람도 여럿 만났습니다. 1주일에 한 권씩 읽는 사람도 있고, 1년에 100권을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가톨릭 신부님은 “지금껏 성경책만 1000번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어마어마한 독서량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통찰력이 더 클 것만 같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접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군요. 서로 다른 책 100권을 읽은 사람보다, 한 권의 책을 100번 읽은 사람의 통찰력이 오히려 더 클 때가 많더군요. 그 신부님도 “성경을 1000번 읽었는데, 그래도 모르겠더라”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 속담은 곰팡이가 핀 책 대신 명상에서 진리를 찾으라고 말한다. [중앙포토]

페르시아 속담은 곰팡이가 핀 책 대신 명상에서 진리를 찾으라고 말한다. [중앙포토]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만약 성경을 한 번 읽고, 묵상을 1000번 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성경 속의 메시지가 산 채로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페르시아 속담은 왜 “곰팡이 핀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진리를 찾아라”고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책은 ‘나침반’일 뿐이니까요.

 가령 서울에서 부산으로 갑니다. 책에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 설명돼 있습니다. 그럼 그 책을 1000번을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서울에 서 있을까요, 아니면 부산에 서 있을까요. 맞습니다. 나는 여전히 서울에 있을 뿐입니다.

그럼 부산으로 가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나의 바퀴가 굴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퀴를 굴리는 방법이 뭘까요.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 불교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 손가락은 목성이나 화성을 가리키지 않고, 정확하게 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경전의 나침반이 있기에 우리가 길을 잃지 않는 겁니다.

종교의 경전은 진리를 가르키는 나침밤이다. 그걸 따라서 수도자들은 진리를 찾아간다. [중앙포토]

종교의 경전은 진리를 가르키는 나침밤이다. 그걸 따라서 수도자들은 진리를 찾아간다. [중앙포토]

그렇다고 경전에만 계속 머물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손가락을 떠날 수 없게 됩니다. 나의 손과 손가락, 손톱 끝까지만 왔다갔다 하며 손가락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럼 어떡할 때 그 손가락을 떠나게 될까요. 그래서 달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할까요. 그렇습니다. 경전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갖다 대며, 이치에 대한 나의 착각과 오해를 무너뜨려 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걸 ‘명상’이라 부르고, ‘좌선’이라고, ‘참선’이라고 부릅니다. 경전 속에 켜져 있는 등불을 나침반 삼아, 내 마음에도 이치의 등불을 켤 때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 됩니다. 그때 비로소 수행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서울을 떠나 부산을 향해, 손가락을 떠나 달을 향해 발걸음을 떼게 됩니다.

창고에 오래 묵혀둔 책에서만 곰팡이가 피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도 곰팡이는 필 수 있습니다. ‘명상’이 생략된다면 말입니다. 좌선한 채 고요히 앉아만 있는 게 명상이 아닙니다. 깊이 묻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궁리(窮理)하는 게 진짜 명상입니다.

 책에는 어김 없이 문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온갖 지식과 정보, 체험이나 깨달음의 창고를 여는 문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그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책 속의 깨달음이 나의 깨달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문고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 문고리는 책만 읽는다고 잡히지는 않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스스로 깊이 묻고, 궁리할 때 비로소 문고리를 잡게 됩니다. 그 문고리를 잡는 방법이 바로 ‘명상’입니다.

책을 읽을 때도 문고리를 찾아야 하지만, 명상을 할 때도 마음의 문고리를 찾아야 한다. [중앙포토]

책을 읽을 때도 문고리를 찾아야 하지만, 명상을 할 때도 마음의 문고리를 찾아야 한다. [중앙포토]

책에도 길이 있고, 내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책에 난 길을 걸을 때 ‘지식’이 쌓입니다. 내 마음에 난 길을 걸을 때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러니 책 속에 난 길도 걷고, 내 마음에 난 길을 향해서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길 눈’이 생깁니다.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내는 눈. 그게 바로 통찰력입니다.

경전을 주로 연구하는 스님을 학승이라 합니다. 선방에서 참선을 주로 하는 스님을 선승이라 합니다. 그럼 책의 문고리와 마음의 문고리, 둘을 동시에 잡아서 여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그럼 학승도 되고, 선승도 되는 겁니다. 원래 둘 사이에는 장벽이 없어야 합니다. 책을 뚫은 만큼, 내 마음도 뚫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곰팡이가 핀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진리를 찾아라. 달을 보기 위해선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라.”

나의 일상에 명상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 때, 나의 하루에 거대한 우주가 들어온다. [중앙포토]

나의 일상에 명상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 때, 나의 하루에 거대한 우주가 들어온다. [중앙포토]

우리는 연못 속의 달을 나침반 삼아, 하늘의 달을 찾으면 됩니다. 경전 속의 달을 나침반 삼아, 내 마음의 달을 찾으면 됩니다. 그렇게 손가락을 떠나, 달을 향해 날아가면 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명상입니다. 그러니 나의 하루에도 명상을 위한 짬을 잠시 만들면 어떨까요. 나의 일상에도 그런 작은 선방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현문우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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