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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종 대신 북소리 미사…마음의 청각장애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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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울 마장동에 생긴 청각장애인 전용 에파타성당

서울 마장동 에파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 제대 왼쪽 벽면은 직선, 오른쪽 벽면은 사선 모양이다. 일반인(직선)과 청각장애인(사선)의 조화와 일치를 뜻한다. [사진 에파타성당]

서울 마장동 에파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 제대 왼쪽 벽면은 직선, 오른쪽 벽면은 사선 모양이다. 일반인(직선)과 청각장애인(사선)의 조화와 일치를 뜻한다. [사진 에파타성당]

‘쿵~’ 하는 소리가 짧고 강하게 울렸다. 그 충격음에 몸도 반응했다. 미세하나마 공기의 떨림이 전해졌다. 조용한 성당 안에 울려 퍼진 북소리다. 서울 마장동 에파타성당 풍경이다. 최근 서울에 들어선 청각장애인 전용 성당으로, 이곳에선 미사 시간에 종 대신 북을 사용한다. 제대(祭臺) 옆에 북이 놓여 있다. 귀로 소리를 듣진 못하지만 몸으로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다.

아시아 첫 청각장애 박민서 신부 #지난 8년간 4만명 정성 모아 완공 #“명절 때 장애인은 더 외로워져 #남의 말 안 듣는 교만이 파멸 불러”

성당 외벽에 새겨 놓은 박민서 주임 신부의 서예 글씨.

성당 외벽에 새겨 놓은 박민서 주임 신부의 서예 글씨.

에파타성당은 지하철 5호선 마장역 3번 출구 옆에 있다. 대지 886㎡(약 268평)에 지하 2층 지상 6층, 연건평 2405㎡(약 727평) 건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다. 2017년 공사를 시작해 2년 만에 완공했다. 지난달 25일 준공식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도 참석해 새 성당의 앞날을 축하했다. 지난 8일 일요일 오전 이곳을 찾아갔다. 미사 시간 30분 전부터 성당 1층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수어(手語·수화언어)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새 집을 장만한 기쁨 때문인지 얼굴이 환하기만 하다.

에파타(EPHATHA)는 히브리어로 ‘열려라’라는 뜻이다. 청각장애인의 입과 귀를 열어준 예수의 일화(마르코 복음)에서 따왔다. 아시아 첫 청각장애인 사제인 박민서(51) 신부의 오랜 꿈이 열매를 맺었다. 말하고 듣기가 불편한 신부가 세운 청각장애인 전용 성당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는 뜻도 된다.

에파타성당은 가톨릭이란 개별 종교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주는 울림이 크다. 장애·비장애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를 향한 메시지가 또렷하다. 박 신부의 ‘희망가’를 들어보았다. 한국가톨릭농아선교회 이윤희 간사가 수어 통역을 맡아주었다.

에파타 성당 미사에 사용되는 북.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에파타 성당 미사에 사용되는 북.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8년 만에 꿈을 이뤘다고 한다.
“2011년부터 전국을 돌며 후원 미사를 올렸다. 해외 한국인 성당도 다녔다. 약 150곳을 찾아갔다. 청각장애에 대한 건청인(建聽人·일반인)의 이해를 높이려 했다. 그간 약 4만 명의 도움이 있었다. 그분들 덕분에 오늘까지 왔다. 우리 성당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청각장애인 성당은 왜 꼭 필요한가.
“몇몇 성당에서도 수어 미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청각장애인 입장에선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일반인 위주의, 때로는 난해한 설교를 수어로 옮기기가 만만찮다. 아무래도 문해력에 차이가 있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미사를 마치고도 소외감에 빠지기 일쑤다. 진정한 소통에 한계가 있다. 예컨대 미국에 있는 한인 성당·교회를 떠올려보라. 영어를 알면서도 현지 성당이 아닌 한인 성당을 찾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왔나.
“서울 수유동 수녀회 건물을 빌려 썼다. 장소가 협소했고 미사를 드리기에도 불편했다. 앞사람이 일어서면 뒷사람이 신부의 손짓·몸짓을 볼 수 없어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새 성당은 300여 명이 함께할 수 있다. 1, 2층 내부를 경사진 계단식으로 꾸몄다. 사각지대가 전혀 없다.”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이라면.
“성당 전체를 밝게 꾸몄다. 일반적으로 성당은 어둡고 근엄한 편인데 청각장애인은 무거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눈도 쉽게 피로해진다. 평일 내내 힘겹게 지내왔는데, 이곳에서만큼은 마음이 가벼워졌으면 했다. 그게 치유다. 실제로 유럽·미국 성당을 여러 곳 둘러봤는데 청각장애인은 침침한 성전보다 화사한 교리실을 선호했다.”
이제부터 또 다른 시작이다.
“청각장애인들은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많다. 그들의 헌금으로는 성당을 꾸려나갈 수 없다. 앞으로도 계속 운영비를 찾아나서야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즐겁고 행복하다.”
박민서 신부가 수어로 ‘서로 닫힌 마음을 열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박민서 신부가 수어로 ‘서로 닫힌 마음을 열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박민서 신부가 수어로 ‘서로 닫힌 마음을 열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박민서 신부가 수어로 ‘서로 닫힌 마음을 열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박 신부는 2007년 사제가 됐다. 서른아홉 한창 늦은 나이 때다. 고교 때부터 신부를 소망했으나 한국에선 길이 꽉 막혀 있었다. 1994년 아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도 꿈을 접을 뻔 했으나 주변 도움으로 2004년 오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 “사제도 서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동기가 필요하다”는 정진석 추기경의 권유에 따라 서울가톨릭대에 편입해 2년 6개월을 더 다녔다. 신부가 되는 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한마디로 기다림,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청각장애 신부는 20명 정도다. 절반 가량이 미국에 있다. 아시아에선 4년 전 필리핀에서 두 번째 신부가 나왔고, 한국에선 현재 예수회 김동준 수사가 박 신부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의 청각장애 목사만 150명으로 추정되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치다. 청각장애인이 신부가 되려면

그만큼 절차와 규정이 엄격한 편이다.

박 신부를 찾아간 데는 추석 명절을 축하하는 뜻도 있었다. 인생 반세기의 수확을 거둔 그에게 한가위를 맞는 기분을 물었다. 대답이 뜻밖이었다. 한 대 얻어맞는 듯했다.

“청각장애인은 추석·설날 같은 명절을 되레 싫어합니다. 가족·친지들이 모일수록 외로움이 더 깊어지거든요. 말이,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들의 짧은 한마디에도 귀 기울여 주셨으면 해요. 그건 비장애인 사이에도 마찬가지겠지요.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건 아닐 테니까요. ‘내가 최고’ ‘나만 옳다’는 교만이 마음의 청각장애를 부릅니다. 성서의 바벨탑을 보세요. 오만은 파멸을 부릅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선 안되겠죠. 물론 청각장애인들이라고 다 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웃음)”

에파타성당 미사는 ‘2중 언어’로 진행된다. 성서 낭독, 성가 합창, 신자들의 기도, 신부의 강론 등 모든 절차가 일반 언어, 수어 두 가지로 펼쳐진다. 때문에 여느 미사보다 15~20분 정도 더 걸리지만 장애·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특히 장애인 신자들이 미사를 주도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윤희 간사의 안내에 따라 성당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장애인 신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공간을 구성했다. 소품 하나 하나도 꼼꼼히 챙겼다. 다른 장애인 건축에서도 참고할 대목이 많다. 우선 제대 뒤 십자가 아래에 대형 LED전광판을 설치, 미사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성당 1층 가장 앞부분은 휠체어석이다. 또 실내 곳곳에 화상전화를 설치해 비상 상황에 대비했다. 화장실에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켜지는 초록불도 친절하다. 지방·외국신자를 위한 게스트룸과 아이·청소년들을 위한 언어치료실도 있다. 지하식당 겸 전시·공연장은 지역주민에도 개방할 예정이다.

이 간사는 “2011년 인천에 국내 첫 장애인 전용 성당이 생겼지만 시설 수준은 비교할 수 없다. 외국에도 이만한 청각장애인 성당은 없는 것으로 안다. 지친 몸을 달래는 온돌방도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장애인 신자 김봉옥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희들의 숙원을 이룬 셈이죠. 앞으로 더 열심히 기도할게요. 그간 성당을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있답니다.”

‘바보’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뜻

에파타성당 외벽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요한복음 6장의 핵심 대목 600여 자가 한글 서예로 새겨져 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생명의 빵’에 비유한 부분이다. 글씨는 박민서 신부가 직접 썼다. 작품 끝자락에 ‘수우’라는 호(號)도 보인다.

“2010년부터 한글 고체(古體)를 배웠습니다. 성당 설계자가 건물 외벽에 성경 구절을 새기려고 했는데 마침 제가 서예를 하고 있다는 걸 안 주변 분들이 저를 추천했어요.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지만, 그것도 하느님의 신비가 아닐까 싶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썼습니다. 빵을 나누는 것만큼 성스러운 게 없기에 관련 구절을 골랐고요.”

‘지킬 수, 어리석을 우’자를 쓰는 ‘수우(守愚)’는 서예 선생님이 지어줬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부른 한국 천주교의 큰 어른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을 본받으라는 뜻에서다. 박 신부는 “스승이 당부한 어리석음의 의미를 늘 새기려 한다”고 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미치도록 쉬운 드럼1』 교재도 눈에 띄었다. “1주에 한 번 드럼과 마술을 배우고 있어요. 미사 때 간단한 마술을 해보곤 합니다. 신자들이 꽤 좋아하죠. 친밀감도 깊어지고요.”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