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29)
"여왕께서 승하하셨다. 모든 대문과 창틀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검은 커튼을 덮어 조의를 표하라!" 빅토리아 여왕이 죽었을 때 영국왕실이 내린 지침이었다고 한다.
아일랜드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으니 당연히 명령에 따라야 했다. "영국 여왕이 죽었다고? 당연히 마음을 표해 드려야지." "페인팅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날을 정해서 일제히 페인트를 칠했다. 밤새도록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빨강, 파랑, 노랑, 핑크, 초록, 보라…… 알록달록 더없이 화려한 색으로. 국상을 선포했는데 축제를 맞이한 듯 더욱 화려하게 변해버렸으니 영국 관리들은 노발대발 난리를 쳤겠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뭐가 문제지? 이게 검정색이 아니란 말이오?"
아일랜드 친구 로스(Ross)는 얘기를 전하며 깔깔 웃었다. 그는 자신의 선대들이 식민시대를 견디고 극복한 방법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영국인들은 우리 아일랜드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하고, 색깔도 구별 못 하는 멍청이들이며, 행동이 느리고 게으른 민족이라고 멸시했지. 무기를 들 수 없었을 때도 우리는 저항했어."
더블린에서 도시를 걸어보면 알록달록한 대문에 시선을 뺏기게 된다. 누가 더 화려하고 밝은 색으로 장식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바라보기만 해도 명랑한 기분이 되는 색깔들, 아일랜드 사람들이 유난히 밝은색을 좋아하는 것이려니 했는데 식민 시대를 건넌 저항의 이야기가 밑바닥에 있었다.
강요된 검정색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일반 건물이나 주택은 그렇다고 쳐도 성당의 문까지 새빨간 색으로 칠했을 줄은 몰랐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는 항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성 니콜라스 성당도 15세기의 유서 깊은 분위기 대신 화려한 빨강을 입고 있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색으로 칠하라는 지배자의 명령에 더 화려한 알록달록 페인트로 화답한 아일랜드 사람들이 생각할수록 유쾌하고 통쾌했다.
여행을 앞두고 난 그 나라의 책과 영화를 찾아보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미리 공부하는 셈치고 본 아일랜드 탐정 수사 드라마 팬이 되었다. 골웨이(Galway)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 탐정의 단골 술집을 찾아 갔을 때, 매력적 좌충우돌 주인공의 흔적보다도 강렬하게 내 주의를 잡은 것은 누군가의 초상이었다. "골웨이 출신의 공화주의자야. 1916년 부활절 독립운동의 주요인물이었어."
아일랜드가 독립 공화국임을 선포한 1916년 부활절 봉기 투쟁은 실패하여 보름도 안되는 기간 동안 16명이 즉결 처형처럼 사형당했다.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민족의식에 불을 질렀고 전면적 독립 운동의 계기가 된다. 시골 술집에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16인 중 한 사람으로 처형당한 이의 초상, 독립운동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니! 이를테면 맥줏집에, 막걸리 집에 유관순 열사의 초상화를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얼핏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가볍게 충격을 받은 느낌도 들었지만 그날 이후 아일랜드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점차 그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식민의 역사를 잊지 않는 것, 독립을 위한 투쟁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은 숨쉬듯 일상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그들의 ‘독립선언문’을 너무 쉽게,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었다.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동네 책방이나 작은 기차역에, 작은 시골 마을의 펍은 말할 것도 없고 소시지나 치즈를 파는 가게의 카운터에도 오래된 신문처럼 보이는 것이 걸려있었다. 말 그대로 어디나 걸려있는 오래된 문서는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 때 발행된 독립 선언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디서나 독립 투쟁의 역사와 증거를 마주하며 사는 사람들.
만약 우리도 1919년 우리의 3.1혁명 독립선언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1919년의 100주년이 되는 올해 새삼스럽게 경제 독립을 위해 부산을 떨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기 지방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둔다. '기억하고 잊지 않기'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의 식민지배와 독립을 위해 치러야 했던 희생을 대하는 방식이었고 그들이 영국을 이기고 극복한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지배의 역사를 겪었고, 결국 지배국을 넘어선 아일랜드를 여행하면 할수록 기억의 방식, 잊지 않고 극복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점점 더 많아진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