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한순의 인생후반필독서(20)
사람에게 마음이 싸늘히 식어갈 무렵이었다. 출판이 본업이라 생각하며 달려온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출판 시장은 아주 좁고 비탈진 언덕에 서 있었다. 어느 모임에 가도 시대의 고민에 대한 대안을 책을 통해 균형을 잡던 출판의 위상은 사라지고, 살짝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보이는 현상마저 엿보였다.
책 주문 1,1,1이라고 쓰여진 매출장부
지나친 자의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자명하게 눈앞에 있다. 전산망이 갖추어지고, 물류가 활발해지고, 무엇보다 시대의 매체가 바뀌면서 책을 1부씩 주문하는 서점이 늘어나고 있다.
아침에 1, 1, 1, 1이라고 쓰인 매출 장부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누구나 매체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그것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단순히 영화 관람하는 자랑부터 ‘옷을 샀어요’, ‘놀러 갔어요’, ‘멋진 곳에 있어요’, ‘맛있는 걸 먹어요’, …아무리 봐도 내가 제일 예뻐요’ 등의 포스팅은 아무런 소구력 없는 종이 인형처럼 사라져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직원들과 이 난국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까 고민하다 별 대안 없이 왜소해져 가는 시기다.
나는 살면서 복권이나 무슨 경품 같은 것이 당첨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저 꾸역꾸역 살아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저금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나 출판 시장은 몇몇 군데를 빼고는 늘 버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기에 그러려니 살다가 호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때로 너무 힘든 고개를 넘어갈 때는 누군가 짠 나타나 나를 구제해주지 않나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이 그곳까지 다다른 나를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한여름의 땡볕과 장맛비를 버텨낸 나무는 초록이 한풀 내려앉으며 좀 나이든 듯 보인다. 이파리는 벌레에 뜯기고 잔가지들은 곤충의 번식 도구로 떨어지는 아침 풍경에 전화벨이 울린다.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 분께 통화가 된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얼른 전화를 걸었다.
“네, 감사합니다. ooo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저희에게 큰 도움 주시고, 어려운 분들께 저희 책이 가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아닙니다. 제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셨잖아요. 아침이면 눈을 뜨기 싫다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노력하셨잖아요. 숙제를 잘하셔서 그런 거예요. 숙제를 못 하는 사람에게는 숙제를 더 줄 수가 없어요. 내줘도 해내지 못하니까요. 그 힘든 일들이 다 좋은 거예요.”
나는 뭐라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그리워했던 독지가의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분은 말을 이어갔다.
“이 책을 본 순간 이건 한 순간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재윤 변호사의 좋은 글에 좋은 그림, 본문의 편집과 제목, 디자인이 모두가 힘을 다한 것이에요.”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는 독지가의 말에 나는 그냥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나이도 어리지 않다. 이제 내년이면 60이다. 그의 목소리는 나보다 더 선배로 느껴졌을 뿐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결이 느껴져 막막한 현실에 나침반을 만난 듯했다.
그분은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을 직접 사 교도소 53개소, 군부대, 초·중·고등학교 기관, 대학, 병원 등에 보냈다.
효율이 판을 치는 세상에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방향이 잘못된 행동을 다시 수정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남들보다 잘살아 보겠다고 난리를 치는 판에 소외되고 외롭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내 가슴이 풍선이 아닌 것이 다행이에요. 풍선이면 터졌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출판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출판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깊이 있는 삶을 만나는 데 있다. 이런 삶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출판 동네다. 얄팍한 잔머리가 수시로 돌아가는 사람도 만나고, 아직도 책을 기증해 달라는 메일이나 요구에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뿌리 깊은 진수를 만나는 즐거움은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가 없다.
한순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