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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회사 다시 나가면 안돼?" 다 큰 자식들의 하소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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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강명주의 비긴어게인(14)

보름달이 뜬 저녁, 딸과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일러스트 강경남]

보름달이 뜬 저녁, 딸과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일러스트 강경남]

“달달 무슨 달, ‘엄마’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는 저녁, 네 살배기 딸과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 직장에서 열일하고 있는 동안 내 딸은 친정엄마가 봐준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친정집에서 딸을 집으로 데려가는 길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더니 역시나 소리친다.

“엄마다. 하늘에 엄마 떴다”. 그러면서 잡고 있는 내 손을 다시 꼭 쥐고 팔을 힘차게 저으며 발걸음도 신나게 노래 부른다. “ 달달 무슨 달, 엄마같이 둥근달….” 보름달 노래다. 얼굴이 동그란 나를 내 딸은 늘 보름달이라고 했다.

퇴근하면 친정엄마로부터 딸 인수  

출근준비로 부산했던 어느 날 아침. 딸을 깨우고 친정집에 데려다주어야 한다. 아침부터 회의에 바쁜 일정들이 있어 마음도 덩달아 바쁘다. 하지만 내 딸은 갈 생각을 안 하고 방에서 꿈적도 하지 않는다. 딸 이름을 부르며, “빨리 가자, 할머니 집에 어서 가자. 엄마 늦는다. 빨리 가자” 하며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딸은 내 손을 뿌리치며 울부짖는다. “엄마 회사 꼭 가야 해?” 아니,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걸까. 내가 오늘 바쁜 줄 아나. 다급해진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 다소곳이 딸 이름을 부르며 말을 이어간다.

“너에게 맛있는 음식과 예쁜 옷 사주려고 엄마가 회사 가는 거야.” 갑자기 딸이 벌떡 일어난다. 이제야 말을 알아듣는구나 하고 함께 일어서는 순간 어린 딸은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간다. 그러더니 그 작은 발을 발돋움해 냉장고 문에 매달리 듯하며 간신히 문을 열어 재낀다.  “엄마 여기 봐, 나 먹을 거 많이 있어, 여기 보라구우”

또다시 쏜살같이 뛰어간다. 이번에는 딸 방이다. “엄마 이리 와봐, 여기 내 옷 많이 있잖아.” 딸 방에서 집이 떠날듯한 큰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방에 가보니 옷장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가쁜 숨을 쉬고 있는 딸을 나도 모르게 덥석 안아준다. 내 양 볼에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린다. “그래 알았어. 일단 할머니 집에 가자. 이따 저녁에 엄마랑 이야기하자. 착하지!” 목멘 엄마 모습을 본 딸은 순순히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이렇게 딸을 엄마에게 부탁하고 출근을 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옷장 문을 열고 있는 딸 모습이 일하는 내내 눈에서 아른거린다.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 후배가 말을 건넨다.

“나도 오늘 애 때문에 힘들었어요. 할머니랑 있지 않겠다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 어쨌든 일하러 나왔으니 대신 더 열심히 일해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친정엄마가 봐주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를 위안했다. 투정부리는 애들을 친자식 이상으로 봐주고 있는 친정엄마가 고마웠다. 딸이 클 때까지 친정엄마는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였다.

딸이 클 때까지 친정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고맙고 예쁜 엄마였다. [일러스트 강경남]

딸이 클 때까지 친정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고맙고 예쁜 엄마였다. [일러스트 강경남]

“엄마, 다녀왔습니다.” 딸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다. 거실을 지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할머니 다녀왔어요. 오늘 잘 계셨어요?”
“아이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손주, 잘 다녀 왔는가?”

어느덧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딸은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 오랜만에 모녀 3대가 함께 모였다. 저녁상을 같이 하며 옛날이야기를 나눈다.

친정엄마는 나보다 훨씬 큰 딸이 대견해 보이나 보다. 어렸을 때 잘 안 먹었는데도 저렇게 컸다고 기뻐한다. 그 시절이 떠오른다. 엄마는 나에게 직장생활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제발 딸에게 신경 좀 쓰라고 퇴근해서 돌아온 나만 보면 늘 딸 걱정을 했다.

모녀 3대 오랜만에 저녁상  

“엄마, 나 어렸을 때 퇴근하고 할머니 집에서 데려와 밤에 재울 때마다 노래 불러주었잖아.  노래 부르다 엄마가 항상 먼저 잤잖아. 엄마 자는 모습 보면 얼굴이 그렇게 달덩이 같았어. 보름달! 엄마가 먼저 잠들 때마다 머리카락 잡아당기면 엄마가 깨는 것이 좋아서 엄마 머리카락 계속 만졌었어. 기억나?”

나는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있다. 딸은 계속 말을 이어간다. “엄마는 나한테 너는 커서 뭐해라, 어느 대학 가라, 전공은 뭐해라, 어느 직장 가라고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어. 내 선택을 믿어 주어서 엄마가 정말 고마웠어.”

딸 대학 졸업식에 가서야 딸이 대학에서 복수 전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부모들은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 좋은 직장 보내기 위해 그리 노력했다는데, 나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엄마였다. 이렇게 잘 커 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을 몰라보다니.

퇴직 후 친정엄마 병간호하면서 늦게나마 딸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함께 못 해준 것이 너무나도 미안해 딸에게 그동안 못 쏟았던 애정과 관심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오늘 언제 오니, 오늘 저녁 뭐해줄까, 오늘 어땠니, 요즈음 얼굴이 왜 까칠해졌니, 내가 뭐해줄까, 옷이 왜 그러니, 화장 좀 해라, 일은 잘하고 있니….”
“엄마 제발 그만 해, 나 이제 다 컸어. 지금 와서 왜 그래.”

옛날 친정엄마 신세 지면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생각난다. 직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한 그들이다. 은행에서, 보험회사에서, 카드사에서 각자 실력을 인정받고 날렸다. 지금은 퇴직했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집에서 쉬겠다고 한다.

조용하던 집안에 잔소리꾼 엄마가 나타나니 가족들과 새로운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일러스트 강경남]

조용하던 집안에 잔소리꾼 엄마가 나타나니 가족들과 새로운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일러스트 강경남]

하지만 만나면 하소연한다. 가족들과 새로운 전쟁 중이라고 한다. 갑자기 조용하던 집안에 엄마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여기저기 참견을 해대는 피곤한 잔소리꾼이 나타난 것이다. 제발 일 다시 하러 나가면 안 되냐고 난리란다. 아마도 일에 쏟던 그 열정을 가족들에게 쏟아붓고 있나 보다.

그중에 한 동료는 신나 보였다. 지난해 외손녀가 태어났단다. 직장생활 하고 있는 딸을 위해 대신 봐주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직장생활 하면서 못했던 사랑을 딸을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어 기쁘다고 한다. 얼마나 손녀가 예쁜지 대화 내내 휴대폰을 펼치며 자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너스레를 떤다. “내 딸이 나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래!”

갑자기 내 딸이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보름달 노래가 떠오른다. 친정엄마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어두운 밤 행여 다칠세라 환하게 밝혀 주는 보름달, 신경질 내도 환하게 웃어주는 보름달, 뭘 잘못해도 그저 말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보름달, 강요하지 않고 한결같이 믿어주는 보름달, 다 잘될 거야 하고 늘 희망을 주는 보름달.

어느새 가을 문턱이다. 추석이 가까이 오고 있다. 다가오는 한가위, 보름달 보며 다짐해야겠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 보름달 엄마가 다시 되어야겠다고!

강명주 WAA인재개발원 대표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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