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들어서는데 저 앞에 낯선 여성이 보인다. 쇠스랑으로 흙을 고르고 있다. 말로만 듣던 ‘우즈베크에서 밭 가는 김태희’ 같은 외모다. 태희 아니랄까 봐 연장 다루는 솜씨가 익숙하지는 않다. 옆 밭에 김장거리를 심으러 왔겠지 했다. 그런데 이거 뭐지? 가까이 가며 보니 내 밭 아닌가. 거듭 팻말 번호를 확인해도 맞다. 태희는 지난주에 쥔장이 로타리 쳐놓은 밭 여섯 뙈기 중 벌써 절반을 손질해놓았다. 우렁각시일 리는 없고, 농사 동무의 안사람인가 하여 기억을 뒤져봤지만 겹치는 얼굴이 없다. 이럴 땐 사태파악이 1순위, 수습은 2순위다. 슬슬 거리를 좁혀가며 적정을 탐색했다.
‘뉘신데 여기서 이러시는 거여요’하고 물어보려다가 흡~하며 입을 닫았다. 분명 자기 밭이라고 여기고 뻘뻘 땀 흘리고 있을 텐데, ‘그러는 너님은 누구세요’라고 반격을 하면 어쩌지, 불온하게 생겨먹은 아저씨가 불쑥 나타나 들이댄다고 여길 수도 있잖아. 일단 태희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5900rpm 속도로 뇌를 굴렸다.
왠지 불길했다. 서늘한 느낌 하나가 스쳐 갔다. 애써 키운 작물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툭하면 털리고, 눈 뻔히 뜨고도 아는 아줌마와 할머니들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동네공인호구라고 소문났으니 만만히 보고 이번엔 밭을 통째로 뺏으러 왔는지도 몰라. 무 배추 모종을 꽂아 놓고 배 째라고 나올 수도 있고. 일단 저질러놓고 지상점유권을 주장하면 골치 아파지는데. 소송이 붙을 수도 있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가고, 저쪽이 심어놓은 김장거리는 쑥쑥 클 테고, 때를 놓친 나는 가을 농사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저 태희는 미모를 앞세워 그걸 노리는 거야. 마침 내가 현장을 봤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네.
나도 땅 얻어 부치는 소작농 신세야. 푸성귀는 나눠줘도 땅까지 내줄 수는 없지. 세게 나가야 돼,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가슴 좍 펴고 주먹 꽉 쥐고 성큼성큼 다가가는데 일하던 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 초롱초롱한 시선을 마주친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며 준비한 대사를 모조리 까먹고는 급 겸손 모드로
“저…저기…안녕하세요…거…거기는요…우리 밭 같은 데요…”
네? 하고 반문하는 태희의 표정이 좀 모자라는 아저씨를 쳐다보는 듯했다. 이 와중에 내가 태희의 안녕을 왜 물었지. 내 밭이면 내 밭이지 우리 밭 같은 데는 또 뭔 소리냐. 그래도 칼을 뽑았으면 두부라도 썰어야지 싶어서…
“호…혹시…번호를 잘못 아시고…”
여전히 버벅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한심했는지 태희가 말을 끊으며 물었다.
“오 이장님 친구분이세요?”
알고 보니 우리 밭에 붙어있는 두 뙈기의 쥔장이었다. 오 이장의 친구 셋이 부치는 땅인데 태희는 그중 한 분이었다. 작년에 스쳐 가며 한 번 본 듯한데, 소파에 휴대전화를 놔두고 출근하다가 버스 탈 때 생각나 씩씩거리며 집으로 다시 가는 아재가 기억할 리가 없지. 태희는 일하는 김에 우리 밭까지 고르는 중이라며 깔깔 웃었다.
조금 있자니 태희 친구 ‘전지현’이 왔다. 오 이장과 최 씨도 왔다. 뒤이어 전 씨가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산길을 넘어왔다. 무 배추 심는 날이니 시간 있는 아재들은 삽질하러 오라고 카톡을 미리 넣어둔 터였다. 같이 농사짓는 동무가 여럿이지만 서로 바삐 사니 한데 모이기는 쉽지 않다. 이즈음이면 주말마다 벌초·혼사·등산·출장 등등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누가 오건 말건 다들 틈틈이 알아서 일하고 알아서 거둬간다.
보름 전에 여름내 자란 풀숲을 평정한 이 씨는 나오지 못했다. 바랭이와 씨름하다 허리가 나가 물리치료를 받고 있단다. 내가 ‘야동 아재’라고 놀려먹는 친구다. 동영상 좋아하는 엉큼한 아저씨라는 뜻이 아니다. 이 친구 고향이 충주시 소태면 야동리다. 신경림의 시로 널리 알려진 목계강변에서 멀지 않다. 한자로 쓰면 冶洞理다. 옛날에 솥을 만들던 골짜기라 풀무골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야동초등학교 교육의 기본방향이 ‘바른 인성과 실력을 갖춘 창의적인 어린이’인데 이 친구에게 딱 맞는 말이다. 야동이란 이름은 생각보다 많아서 파주·보령·김천·고창·구례·창녕·강진·화순 등 곳곳에 있다.
심심풀이 삼아 방방곡곡에 널린 재미난 지명을 찾아봤다. 연탄리·압사리·고도리·오류리·관음동·사정동·후지리·도로리·설마리·고문리·신음동·사탄마을·목욕리·대박리·우동마을·방광리·망치리·소주마을·파전리·효리·고자리·술상마을·방구마을·국수리·유방동·고사리·가학리·주정마을·계란마을·객사리·구라리·대변리·파산동·정자동….
늦여름 밭일은 ‘짐승 체력’을 가진 야동 아재도 나가떨어질 정도로 고역이란 말을 하려다가 얘기가 옆으로 샜다. 동무들과 두 여성 덕분에 배추 모종 180개 무 모종 240개를 심었다. 그 옆에 열무와 얼갈이 배추씨도 뿌렸다. 시들시들한 토마토 줄기를 걷어낸 자리에는 아욱·근대 씨를 넣었다.
무당거미 일당이 오이 지지대에 쳐놓은 그물에는 날벌레 잔해가 수북하다. 맛없다고 버렸는지, 아껴서 먹는 중인지 알 수 없다. 요놈들은 둥그런 진지 한가운데서 일광욕을 하다가, 먹이가 걸리면 돌돌 말아 한쪽에 매달아 놓고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어떤 규칙을 가지고 줄을 칠 텐데, 난도 높은 고차방정식이 숨어 있는지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치는 건지 내 눈으로는 도통 모르겠다. 그물이 구멍 나면 때워 쓰는 꼴로 보아 그리 깔끔한 성격은 아니다. 말라가는 오이 덩굴을 마저 치우니 여름내 어수선하던 밭이 훤해졌다. 햇살은 꺾이고 풀들도 기가 죽어간다. 밭은 이제 가을방학이다.
강탈당했다고 생각한 밭 되찾고, 동무들 덕에 일도 일찍 마쳤다. 용꿈 꾼 날이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