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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공학, 여성의 감성 중요…코딩교육 내년 의무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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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호 10면

[양영유의 총장 열전] 김혜숙 이화여대 총장 

이화여대 공학의 산실인 연구협력관을 찾은 김혜숙 총장은 ’글로벌 기술전쟁 시대에 여성 인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며 ’정부가 석·박사 여성 연구원에게 출산 장학금을 지원해 저출산과 경력단절 문제를 해소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이화여대 공학의 산실인 연구협력관을 찾은 김혜숙 총장은 ’글로벌 기술전쟁 시대에 여성 인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며 ’정부가 석·박사 여성 연구원에게 출산 장학금을 지원해 저출산과 경력단절 문제를 해소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김혜숙(65) 이화여대 총장은 철학자다. 공대 출신 총장들도 놀랄 정도로 과학기술에 밝다. 지난달 14~17일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한미과학기술학술대회(UKC)’를 다녀왔다. 서울대 오세정, 고려대 정진택, 아주대 박형주 총장 등 이공계 출신 총장들과 동행했다. 김 총장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스티브 잡스(리드대 철학과 중퇴)가 아이폰 신화를 만든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기술은 별개가 아니다”며 “인공지능(AI) 시대는 여성 공학도에겐 새로운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화여대 총장실에서 만난 김 총장은 먼저 연구협력관부터 둘러보자고 했다. 2학기를 맞아 오픈한 연구협력관은 활기가 넘쳤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새 건물엔 휴먼기계바이오공학부 랩, 메디컬 AI연구실, 양자나노과학연구단, 고분자전자재료 연구실, 무진동 실험실 등이 들어서 있었다. 김 총장은 “1996년 세계 여자대학 최초로 공대를 설립한 데 이어 2017년 엘텍(ELTEC)공대로 확대 개편한 ‘이화 공학’의 산실”이라고 설명했다.

철학 공부했던 잡스 ‘아이폰 신화’ #인문학·과학기술은 별개가 아니다 #첨단 장비 빼곡한 연구협력관 #AI·양자나노 등 공학 산실 될 것 #공학계 여성 교수 비율 5.5% 그쳐 #석·박사 과정 출산 땐 장학금 지원을

“남성과 섞여 경쟁하는 건 졸업 후에”

연구협력관이 신선합니다.  
“AI·양자나노·고체물리학·광학 등 세계적 수준의 연구 공간입니다. 지난 6월 완공해 2학기 개강과 동시에 문을 열었어요. 언론인 중 제일 먼저 보시는 거예요. 우리 대학은 상반기에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에도 선정됐어요. 빅데이터·AI·인터랙션·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전문가가 많이 나올 겁니다. AI 시대의 핵심인 감성과 상상력의 역량강화(empowerment) 현장입니다.”
14개 단과대, 73개 전공, 학생 수 2만5000명인 이화여대에서 엘텍공대는 입학정원이 전체의 16%(514명)로 가장 큽니다.
“81년 국내 최초의 전산과로 시작했는데 세계적 규모로 성장했어요. 엘텍공대와 연구협력관은 일심동체입니다. 공대 취업률은 70%를 넘어 다른 단과대보다 높아요. AI도 뒤지지 않아요. 다른 대학에서 만든 AI 커리큘럼은 대부분 우리 대학 휴먼기계바이오학과에서 하는 겁니다. AI 대학원도 만들 생각인데 등록금 동결 등의 여파로 재정이 여의치 않아 전문가 영입이 고민입니다.”
캠퍼스를 돌아보니 코딩교육 의무화가 이슈인 것 같습니다.
“내년에 1학년부터 의무화합니다. ‘컴퓨팅과 수리적 사고’ 영역에 관련 과목을 개설해 필수로 이수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코딩 교육은 AI 시대 융·복합 인재양성에 꼭 필요합니다.”

김 총장은 ‘차가운 기계’로 상징되는 AI 시대에는 따뜻하고 섬세한 공학적 감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학계의 남녀 불균형을 바로잡을 기회라고도 했다.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72.7%로 남학생(65.3%)보다 높아요. 4년제 공대의 여학생 비율도 85년 2.7%에서 지난해는 19.1%로 7배가량 급증했어요. 이대 역할이 그만큼 컸죠. 하지만 공학계 여성 교수 비율은 5.5%에 불과해요. 여성 인력 누수현상(Leaky Pipeline)이 심각하기 때문이죠. 결혼과 출산, 남성 중심의 연구문화 등 요인은 복합적입니다. AI시대 여성의 감성이 세상의 균형을 잡는 힘이 될 수 있어요.”

김 총장은 “석·박사 과정 여성이 출산하면 정부가 장학금이나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엉뚱한데 저출산 예산을 쏟아붓지 말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한미과학기술학술대회를 다녀오셨는데 철학자가 과학에 열정적이네요.
“박사 학위 논문에 칸트를 다뤘어요.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정당화를 시도했던 인물입니다. 처음부터 과학의 개념적 토대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해보니 철학과 과학이 다른 것도 아니더군요. UKC는 올해 21번째 행사였는데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한 스마트 과학·공학·보건’을 주제로 물리·화학·수학·생명공학 등 12개 심포지엄이 열렸어요. AI 시대에는 집단 지성의 협업이 절실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133년 역사의 이화여대는 세계 최대 여대인데 글로벌 위상이 약합니다.
“대학평가 논문이 이공계와 의·생명 중심인데 진입이 다소 늦었어요. 공대와 의학 생명 분야가 강화돼 앞으론 달라질 겁니다. 라이덴 랭킹(네덜란드 라이덴대가 논문을 기준으로 평가한 대학 순위)은 국내 종합대학 수위입니다.”
의학·생명 분야 강화를 위해 올 5월 마곡지구에 이대서울병원을 개원했습니다.
“환자 중심의 스마트 병원입니다.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던 조선의 부녀자들을 위해 1887년 문을 열었던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의 정신을 살리자는 취지입니다. 국내 최초의 기준 병실 3인실, 모든 중환자실 1인실 시스템입니다.”
싱가포르 난양이공대는 KAIST와 포스텍을 벤치마킹해 91년 설립했는데 글로벌 대학이 됐어요. 핵심은 개방성입니다.
“개방성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합니다. 난양이공대는 매년 100명의 교수를 평가해 내보냅니다. 철저한 실적주의 문화지요. 우리 나라에선 정서상 다소 어려운 과제지요.”
‘나 이대 나온 여자야’로 희화되는 폐쇄성과 배타성에 대한 지적이 많아요. ‘가모장제(家母長制, Matriarchy)’ 거버넌스 영향 탓도 있다고 봅니다. 단적으로 숙명여대 출신 교수가 한 명도 없잖아요.
“(웃으며) 왜 숙대 얘기를 하시나요? 다른 여대 출신은 있어요. 가모장제는 지난 얘기입니다. 지금은 분권화되고, 교수평의회가 구성되고, 자율운영 문화가 정착됐어요. 똑똑한 여성일수록 우리 대학에 더 많이 와야 해요. 우리처럼 여성 리더를 많이 키워내는 대학은 세계에 없어요. 남성들과 섞여 경쟁하는 것은 졸업 후에도 충분해요.”

김 총장은 이화인의 소명은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대학을 따라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것이다. “이제껏 여성이 인간의 문명을 정의한 적이 없어요. 남성 위주의 세상에 맞추려 노력만 했죠.” 4차 혁명시대에는 공감과 감성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키를 잡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조국 캐슬’ 논란은 사회 공정성 문제

김 총장은 2016년 이화여대 사태 때 용광로의 한복판에 섰던 인물이다. 학생들이 평생교육단과대 설립에 반대하며 점거 농성을 벌이자 교수 시위를 이끌었고, 최순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자연스럽게 정유라 입시 부정과 ‘조국 캐슬’ 얘기도 나왔다.

2016년 12월 15일 최순실 청문회 때 왜 눈물을 흘리셨나요.
“순간 울컥했고, 콧물이 좀 나와 휴지로 닦았어요. 집에 귀가했는데 남편이 ‘왜 울었냐’고 묻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제 표정과 무덤덤한 다른 증인을 대비시켜 놨더군요. 사실 저도 그때야(눈물을 흘린 걸) 알았어요. 청문회장에선 머리가 하얗게 되고 생각이 안 나더군요. 형광등 불빛이 쏟아지고, 카메라는 엄청 많고….”
청년들이 입시 공정성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은 입시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관리해 왔어요. 정유라 문제는 시스템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였어요. 책임자가 원칙을 철저하게 안 지켰던 것 같아요. ‘조국 캐슬’ 논란은 입시 공정성보다는 우리 사회 전체의 공정성 측면에서 봐야 할 것 같아요.”
올해 대학 입시가 시작됐습니다.
“전체 모집 정원 3031명의 74.2%인 2248명을 수시로 선발합니다. 정시에서는 인문·자연 계열별 통합으로 380명을 뽑아요. 최초 합격자 상위 50%에게는 4년 전액 장학금을 줍니다. 내년에는 정시비율이 30% 이상으로 높아집니다.”
왜 정시 비율을 높이나요.
“교육부가 정시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30만 명도 태어나지 않는 시대에 입시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건 난국입니다. 30만 명을 모두 1등으로 키워내려는 노력과 정책이 절실해요.”

교수·학생·직원·동문 함께 뽑은 첫 총장

이화여대 역사상 교수·학생·직원·동문이 함께 뽑은 첫 직선제 총장이다. 2017년 5월 31일 제 16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여자대학으로 세계를 새롭게 창안하는 지식 첨병의 역할과 소명을 공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갈라지고 상처받은 구성원과 학생들을 권위적 리더십이 아닌 소통과 자율을 통해 함께 하는 ‘팔로어십’으로 다독였다. 어머니 같은 따뜻한 마음의 거버넌스 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평이다.

학창 시절 데카당스와 실존주의를 탐색했고, 조직 생활보다는 공부하는 걸 좋아해 학자의 길을 걸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미국 시카고대에서 철학박사(인식론 및 예술철학) 학위를 받았다.

1987년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으며, 스크랜튼대 학장과 인문학연구원장을 지냈다. 칸트와 헤겔의 권위자이며 철학방법론과 여성·예술 철학에 조예가 깊다. 교수 시절 ‘칸트와 헤겔’ 강의는 명강좌로 꼽힌다. 한국철학회 첫 여성회장과  한국분석철학회장, 한국인문총연합회 대표회장으로 활동했다. 여성 리더들이 서로가 서로의 디딤돌이 돼 주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사색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1954년 경기도 김포 출생.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yangy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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