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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정치의 세계에서는 위선도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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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호 31면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모든 사회는 위선적이다.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하는 유럽에는 농노제가 있었고 조선에는 노비제가 있었다. 사람도 위선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의미에서 위선자다. 정치인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위선자다.

정치적 위선 없이는 타협 불가능 #국익·민익 위한 위선은 좋은 위선 #정치가 선악 싸움되면 위선자 양산 #집권 전 말과 집권 후 행동 달라야

하지만 일반인의 위선과 지도자의 위선은 경중(輕重) 판단 기준이 다르다. 지도자에 대해 잣대가 더 엄격하다. 지도자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국익(國益)과 민익(民益)을 지키고 늘려야 하는 선봉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권이 위선 문제로 뜨겁다. 양국 정치가 닮은꼴인 이유 자체가 흥미롭다. 민주정체 혹은 대통령제에 나타나는 공통분모 현상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친미 사대주의’ 때문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미국을 모델로 삼아 벤치마킹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좋은 면뿐만 아니라 나쁜 면에서 미국과 비슷한 나라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도덕 기준이 너무 높은 사회는 위선자를 양산한다. 정치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선악의 대결이 될 때 상대편은 죄인이고 위선자다. 한마디로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미국 문화의 본바탕인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음행을 하는 게 아니라 음행을 ‘즐겁게’ 상상하는 것도 죄다. 유교도 마찬가지다. 도덕 기준이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는 갓끈도 함부로 고쳐 매면 안 됐다.

좌파·우파, 진보·보수로 갈린 미국 정치인들은 서로 위선자라고 공격한다. 중도파 입장에서 보면 피장파장이다. 겨 묻은 개는 보이지 않는다. 똥 묻은 개들이 ‘너희들은 똥으로 뒤범벅이지만 우리는 똥이 살짝 묻었을 뿐이다’ ‘우리 똥은 냄새가 별로 안 난다’는 식이다. 중도파가 보기엔 양쪽 다 한심하다. 양쪽의 ‘이념적 종족주의’가 이해가 안 된다.

한국과 미국 정치의 위선은 종목이 좀 다르다. 미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위선은 이런 것들이다. 동성연애나 동성결혼을 맹렬히 공격해온 정치인이 알고 보니 그 자신 동성연애자였다. 입만 열면 가족의 가치를 외치던 정치인이 상습적으로 불륜을 저질렀다. ‘낙태는 살인’이라던 정치인이 내연녀에게 낙태를 강요했다. 앉으나 서나 ‘환경 환경’하며 노래를 불렀지만, 분리수거조차 제대로 안 한다. 자본주의를 욕하면서 자본주의로 누릴 수 있는 온갖 혜택은 모두 다 누린다.

위선(僞善)은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이다. 언행 불일치가 위선이다. 지나친 위선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미국에서도 정치인 위선자는 대부분의 경우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유권자의 파벌성·편파성 덕분이다. 공화당 내의 상대적 좌파와 민주당내의 상대적 우파는 씨가 말랐다. 미국의 부모들은 예비 사위·며느리가 인종이 다른 경우보다 정파가 다를 때 더 크게 낙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미국 정치인들은 자기 합리화에 능하기 때문에 그들의 위선을 둘러싼 논란이 흐지부지되기 일쑤라고 한다.

선데이 칼럼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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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치에서 위선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위선에도 좋은 위선, 나쁜 위선이 있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이 정치에 세계에서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공약)과 행동(집권 후 정책)이 다르지 않으면 타협할 수 없다. 국정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많은 경우 말을 바꾸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이다.

예컨대 반대기업·친노동자 공약으로 당선된 지도자라도 국익과 민익, 특히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대기업 정책을 펼쳐야 할 때가 있다. 평등한 교육을 위해 특목고·자사고를 없애는 것을 기조로 삼았더라도 국가의 교육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기조를 바꿀 수 있다.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라 특목고·자사고에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을 국가와 정부가 마련하는 게 진정한 평등일 수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여야간 정권 교체의 결과로 국민·유권자가 기대하는 지도자들의 도덕성 수준이 천정부지로 점점 높아졌다. 그 어느 정당도 정치인도 공직자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고고익선(高高益善)일까. ‘나쁜 놈’을 뽑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도자의 불법·탈법은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더라도 뿌리 뽑아야 한다. 하지만 ‘나쁜 놈’에 대한 정의가 현실적인 필요는 있다. 청문회나 선거는 성불(成佛)한 사람이나 성인(聖人)을 뽑는 자리일까.

지한파 공공지식인인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에게 “프랑스는 왜 미국과 달리 대통령들이 임기를 마친 후 법적인 문제에 시달리는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프랑스의 정치 관련 법규가 미국에 비해 지나치게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스 법을 미국 정치인들에게 들이밀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관련 규정이 너무 빡빡한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청문회나 선거 캠페인에서 벌어지는 위선 논란을 보고 우리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미래 지도자가 되려면 앞으로 올바르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공무원 시험이 최고다’라고 생각할까. 두렵다.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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