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주주권을 더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주식대량보유 보고제도(일명 ‘5% 룰’)를 완화하기로 했다.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는 기관투자자가 주식 보유 목적 등을 공시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선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대한 정부 입김이 더 세질까 우려스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주식 보유목적, 지분 변동 등 #기관투자가의 공시 부담 줄여줘 #“기업 경영에 정부 입김 세지고 #적대적 M&A 무방비 노출 우려”
5일 금융위원회는 ‘5% 룰’ 규제를 개선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6일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상장사 주식 등을 5% 이상 보유하게 되거나 이후 1% 이상 지분 변동이 있는 경우 5일 이내에 보유목적과 변동사항을 보고ㆍ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상장사 주요 주주의 지분 정보를 시장에 공개해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고, 상장사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ㆍ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면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자, 상세보고 대상(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맡은 보건복지부도 ‘5%룰 때문에 국민연금의 상세한 투자 전략이 공시를 통해 노출돼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금융위에 전달했다.
개정안은 이런 요구를 반영했다.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는 기관투자자가 위법 행위를 한 기업 임원의 해임을 요구하거나 정관 변경을 추진하더라도 5일 내에 약식으로 보고하면 된다. 현재는 지분율과 자금 조성 내역 등을 상세히 공시해야 한다. 또 임원 보수 삭감 요청이나 배당 확대 같은 주주 활동은 월 1회 약식으로 공시해도 된다. 금융위는 “정관 변경이 특정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을 겨냥한 것이거나 특정 임원의 선ㆍ해임에 즉각적 영향을 주는 경우엔 여전히 상세보고 대상”이라고 밝혔다.
재계에선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적대적 M&A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이 컸다. 대한상의 이경상 기업환경조사본부장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하는 기준이나 목적이 아직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5% 룰부터 완화해버리면 기업은 다른 행동주의 펀드의 적대적 M&A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5% 이상 주식을 보유하는 주주가 생겨도 이를 모르고 있다가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분 5% 이상을 가진 주요 주주의 정보 공개가 뜸해지면서 소액주주에 대한 정보 제공은 소홀해진 면도 있다.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도 우려의 한 배경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5%룰이 완화된 만큼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과 자본 시장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길이 더 넓어졌다”고 해석했다.
특히, 국민연금은 일본ㆍ캐나다ㆍ미국ㆍ네덜란드 등 해외 주요 연기금이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금운용위원회를 통해 운용되는 것과 달리, 정부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렵다.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20명 중 5명이 현직 장ㆍ차관이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당연직으로 참여한다. 정부의 영향력이 큰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쉽 코드 도입 이후 기업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사결정에 나서고 있다. 대한항공은 올해 3월 고(故)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국민연금이 반대해 조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났다. 국민연금은 이후 SK 최태원 회장에 대해서도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 침해 이력’을 이유로 연임에 반대했다.
재계에선 삼성전자도 이번 5%룰 완화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횡령ㆍ배임죄가 확정되면 삼성전자의 지분 9.97%를 가진 국민연금이 약식 보고만으로 이 부회장의 해임을 청구할 수 있게 됐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여론이나 정권의 바람에 따를까봐 걱정하는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주주 이익에 부합하는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원래 목적에 맞는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련·하현옥 기자 park.suryon@joon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