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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거대 온라인 쇼핑몰이 밀어주는 한국 패션 디자이너...'르917' 신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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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4일 패션 브랜드 '르917(Le 17 Septembre)'을 전개하고 있는 신은혜 디자이너가 세계 최대 패션 쇼핑 사이트인 ‘네타포르테’의 ‘더 뱅가드(THE VANGUARD)’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더 뱅가드는 네타포르테가 지난 2018년부터 시작한 신진 디자이너 발굴·육성 프로젝트로 이번이 3회째다. 한 회에 단 4개의 디자이너 브랜드만을 선발한다. 더 뱅가드에 선발되면 네타포르테가 옷을 대량으로 사들여 쇼핑 사이트에서 판매하고, 또 특별 화보를 제작해 사이트 전면에 내세우는 등 적극적으로 홍보해준다.

신은혜 디자이너의 르917 의상. [사진 르917]

신은혜 디자이너의 르917 의상. [사진 르917]

네타포르테는 2000년 시작해 이제는 한 달 사용자만 해도 170여 개국의 700만 명이 넘는 거대 온라인 패션 사이트다. 취급 브랜드 수만 해도 구찌·프라다 등 럭셔리 패션 브랜드부터 비건 화장품까지 1000개가 넘는다. 그래서 더 뱅가드에 선정되기만 하면 실질적인 해외 판로가 생기는 동시에 '네타포르테가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 패션업계의 주목을 받는다. 반가운 소식에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르917의 쇼룸을 찾아 신 디자이너를 만났다.

'르917' 신은혜 디자이너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자신의 쇼룸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신 디자이너는 글로벌 명품 온라인 쇼핑몰 ‘네타포르테’의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인 ‘뱅가드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김상선 기자

'르917' 신은혜 디자이너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자신의 쇼룸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신 디자이너는 글로벌 명품 온라인 쇼핑몰 ‘네타포르테’의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인 ‘뱅가드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김상선 기자

“처음엔 소식을 듣고도 '안 한다'고 했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많아지면 실수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게 싫더라고요. 그러면 좋은 옷을 만들 수가 없잖아요. 그 이야기를 했더니 패션 일을 하는 주변 분들이 '좋은 기회이니 받아 들여라'라며 어이없어 하시는 걸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죠. 지금은 얼떨떨해요. 할 일이 몇 배로 늘어나 최근 몇 달간 몸살을 달고 살았어요.”
더 뱅가드에 선정된 소감을 묻자 신 대표가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르917은 한국 시장에서 소규모 수량을 유통하던 작은 패션 브랜드다. 온라인 유통을 기반으로 해 그의 옷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인스타그램과 자사 온라인몰, 가로수길의 쇼룸 한 곳이 전부다. 단 인스타그램에선 옷을 팔지 않고 쇼룸에서 해당 옷을 볼 수 있는 날짜를 공지하고, 쇼룸 방문 예약을 받는다. 직원도 자신을 포함해 4명이 전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패션계의 아마존'으로 통하는 네타포르테에 입점하는 게 기쁘면서도 준비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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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사고 싶어도 못사는 옷'으로 입소문

르917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2017년부터다. 주목할만한 건 컬렉션 쇼나 별다른 홍보 없이 인스타그램 포스팅 사진만으로 입소문이 났다는 점이다. 2013년 처음 론칭해 그의 옷을 입어본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알려지다가, 2017년 인스타그램에 올린 컬렉션 사진이 해외 유명 잡지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리그램되면서 화제가 됐다. 이를 통해 '레인 크로포드' '빔즈' 등 해외 쇼핑몰들의 관심을 받았고, 해외 패션지 '보그 우크라이나'의 패션 에디터는 메일을 보내와 옷을 직접 구매하기도 했다.

'르917' 신은혜 디자이너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쇼룸. 공간 디자이너 르동일씨에게 의뢰해 르917과 가장 어울리는 공간으로 꾸몄다. 김상선 기자

'르917' 신은혜 디자이너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쇼룸. 공간 디자이너 르동일씨에게 의뢰해 르917과 가장 어울리는 공간으로 꾸몄다. 김상선 기자

주름이 있거나 독특한 패턴이 있는 원단을 사용한 원피스들. [사진 르917]

주름이 있거나 독특한 패턴이 있는 원단을 사용한 원피스들. [사진 르917]

살짝 비치는 주름진 면 소재로 만든 원피스는 올 봄여름 시즌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제품이다. [사진 르917]

살짝 비치는 주름진 면 소재로 만든 원피스는 올 봄여름 시즌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제품이다. [사진 르917]

국내에서는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옷'으로 통한다. 온라인 쇼핑몰과 쇼룸 예약 판매, 쇼룸 판매 이렇게 3가지 방법으로 옷을 판매하는 데, 채널별로 내놓는 옷 종류가 다르고 판매 수량이 적어 금방 동이 난다. 게다가 신제품을 일정 기간 동안 조금씩 나눠 출시하는 드롭 방식으로 내놓고, 옷이 다 팔려도리오더를 하지 않아 출시일을 놓치면 해당 옷을 살 수 없다. 그래서 르917의 팬들은 수시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확인하며 내가 원하는 옷이 언제 나오는지를 지켜본다.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모든 게 원단때문이다. 나는 옷 디자인을 원단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름답고 느낌이 좋은 원단을 보고 '이걸로 이런 옷을 만들면 예쁘겠다'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제한된 원단량에 맞춰 옷 생산량이 달라진다. 그 원단이 다 소진되면, 같은 옷은 다시 만들지 않는다. 원단이 바뀌면 그 느낌이 안 사니까."

르917, 네타포르테 '더 뱅가드'에 선정 #SNS에서 더 유명한 한국 패션 브랜드 #독학으로 패션 공부, 블로거에서 디자이너까지

 [사진 르917]

[사진 르917]

[사진 르917]

[사진 르917]

[사진 르917]

[사진 르917]

더 흥미로운 건 신 대표가 패션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선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결혼 후 블로거로 활동하며 옷을 선보이다 브랜드까지 확장했다.

어떻게 르917을 만들게 됐나.

“대학 시절부터 옷을 워낙 좋아했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옷을 사면 그대로 안 입고 내 나름대로 염색을 하거나 리폼을 해서 입었다. 그러다 2013년 남편의 격려에 직접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했다. 맨투맨 셔츠와 트렌치코트를 각 30장씩 만든 게 시작이다.”

초보자에게 패션 브랜드 론칭이 쉽진 않았겠다.

“말도 마라. 시장과 공장, 패턴실 할 것 없이 무시 많이 당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어느 날은 종이 2장에 빼곡하게 현장에서 많이 쓰이는 패션용어들을 적어서 주더라(※신 대표의 남편은 타임 옴므 출신 액세서리 디자이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원하는 데로 옷이 안 나왔던 거다. 옷과 관련한 지식이 별로 없으니 당연했다.”

독학으로 판 디자인이 '독특함' 만들어

독학으로 꾸린 브랜드이지만 르917에 대한 평가는 호평 일색이다. 그를 더 뱅가드에 선정한 네타포르테의 엘리자베스 본 더 골츠바잉 디렉터는 “신 디자이너는 독학으로 패션디자인을 공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브랜드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한국 패션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디자이너로 주목받고있다”며 “미니멀하면서 자연스러운 우아함이 내재한 그의 디자인은 분명 가장 비밀스러운 옷장을 만들어 줄 최고의 아이템이다. 르917은 우리가 전 세계의 고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단연 돋보이는 훌륭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 디자이너의 옷은 남색, 회색, 흰색 등 무채색이 많다. "어디에도 무난하게, 쉽게 입을 수 있는 색상이라서 좋아한다"고. 김상선 기자

신 디자이너의 옷은 남색, 회색, 흰색 등 무채색이 많다. "어디에도 무난하게, 쉽게 입을 수 있는 색상이라서 좋아한다"고. 김상선 기자

스스로 생각하는 르917의 매력은.

"이것 또한 원단에서 나오는 건데, 다른 브랜드에선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옷은 간결하고 미니멀한 실루엣을 가진 옷, 몸을 많이 드러내지 않아도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옷이다."

영감은 어디서 받나.

"역시 소재다. 원단이 주는 느낌과 촉감을 보면서 옷 디자인을 구상한다. 그래서 평소에 늘 소재를 보러 동대문종합상가부터 수입 원단 에이전시까지 다 간다. 의류용 원단만 보지 않고 이불, 신발, 커튼, 가방 등 여러 분야에 쓰이는 원단을 다 본다."

인스타그램에서부터 네타포르테까지 인기가 높다. 그 비결은.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던 게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기본 지식이 없으니 무모하리만치 실험적인 옷들을 많이 만들었다. 기능성 원단을 빼곡하게 주름 잡아 트렌치코트도 만들어보고 이불용·신발용 원단 가리지 않고 옷이 되겠다 싶은 원단으로는 다 옷으로 만들어봤다. 이런 실험 끝에 나온 '남다름' 때문 아닐까."

옷에서 한복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의도한 건가.

"맞다. 한복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한복은 드러내는 옷이 아니다. 몸을 꼭꼭 감추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소매선은 둥글고 앞선은 직각으로 이루진 경우가 많은데, 이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르917의 옷에도 여러 부분에서 한복의 요소들을 녹여냈다. 그래서 그런지 해외 바이어들이 우리 옷을 보고 '동양적인 색채가 묻어있다'고 말하더라."

인터뷰 말미 수상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자, 신 대표는 공을 가방 디자이너 구지혜 대표에게 돌렸다. 구 대표는 지난해 9월 1회 더 뱅가드 프로그램의 디자이너로 선정됐었다.
“나는 구 디자이너가 앞길을 잘 닦아 놓은 덕을 봤다고 생각한다. 이미 ‘구드’로 한국 패션의 맛을 봤고 좋은 이미지로 남았기에 이번에도 한국 브랜드를 선정하는데 저항감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옷도 한 시즌 것만 보고 바로 이런 좋은 기회를 준 걸 보면 한국 패션에 대한 평가가 좋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나 역시 좋은 옷을 선보이는데 더 노력해야할 것 같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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