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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의 국내 정치, 연합훈련의 국내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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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청와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종료하기로 한 데 대해 미국 국방부의 랜들 슈라이버 차관보가 “안보 환경보다 국내 정치를 앞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건 대단히 이례적이다. 미 국방부의 현직 차관보가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공개적으로 ‘국내 정치’를 거론하며 종료 결정을 사전에 들은 바 없다고 발언했으니 이건 평소의 한·미 관계가 아니다. ‘빛 샐 틈 없다’던 한·미 관계에 마치 구멍이 생겨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다.

지소미아에 관한 한 정부는 임기 내 결자해지해야 한다. 결연한 대일 의지를 보여주는 충격요법 카드로 썼지만 차기 정부로 그 부담을 넘겨서는 안 된다. 국민 정서는 한국을 못 믿을 나라로 폄하하는 일본에 왜 정보를 주느냐며 발끈하겠지만, 나라의 근간인 안보와 경제에 관한 한 국정을 책임진 세력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전 파병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좋아서 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국내 정치’에 관한 한 역시 당혹스러운 건 한국 내 ‘동맹파 국민’이다. 미 국무부·국방부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놓고 펄쩍 뛰는 이유는 북한의 미사일 때문이다. 마하로 날아오는 미사일에 대응하려면 속도가 제일 중요하다. 사전에 발사 준비를 포착하고 쏘는 순간을 잡아내 순식간에 궤도를 계산해 대응하는 ‘속도의 싸움’이다. 이 속도전의 최전선에 있는 게 한국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슈라이버 차관보가 “예를 들어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앞뒀을 때 우리는 느리고 번거로운 절차를 원하지 않는다” “시간이 본질”이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다.

이처럼 지소미아는 북한 미사일 때문에 필요한데 북한 미사일이 별거 아니라고 하면 지소미아의 존재 이유를 놓고 논리적 모순이 된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 미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지소미아로 복귀하라”고 공개 촉구했는데 이들의 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쏴대는 미사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런 미사일을 실험한다”라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미사일을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미국 대선 외에선 해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및 핵 실험 유예를 재선 가도에서 업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애써 눈감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훈련을 놓고 ‘도발적’이라고 하더니 이젠 ‘완전한 돈 낭비’로 표현했다. 여기엔 한국을 안보 분담 ‘짠돌이’로 여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 작용했겠지만 동시에 미국 내 지지층을 향해 ‘남의 나라 국경을 대신 지켜주지 않겠다’는 캠페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미 연합훈련이 도발이고 돈 낭비라면 주한미군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훈련도 안 하는 군대는 억제력은 없으면서 비용만 드는 돈 먹는 하마이기 때문이다. ‘미군 철수’는 국내 진보 진영에서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이젠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미군 철수의 전 단계인 ‘연합훈련 불필요’를 듣는 상황이다.

트럼프 정부가 진심으로 집요하게 북한 비핵화에 나서 북핵을 지워버리고 남북 경제공동체 구성에 공헌한다면, 이를 위해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역발상의 ‘김정은 품기’ 전략을 쓰고 있다면, 한국 국민들은 그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방위비건 뭐건 기꺼이 더 부담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미국엔 영향이 없는 선에서 북핵을 묵인하고, 한국을 향해선 ‘내 돈 네 돈’으로 가자는 거라면 동맹은 형해화된다. 국내 정치를 위해 한·미동맹을 흔들어서는 안 되는데 그건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