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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한 병에 2000만원,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32)

지난달 16일 일본 위스키 54병짜리 세트가 홍콩 경매에서 719만 2000 홍콩 달러(약 11억 원)에 낙찰됐다. 경매에 오른 위스키는 일본 치치부 시에 있는 ‘벤처 위스키’사의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하뉴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 54종에 트럼프 카드 라벨을 부착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9년에 걸쳐 출시했다. 같은 세트가 지난 2015년에도 이 경매장에서 낙찰됐는데, 4년 만에 낙찰가가 약 2배로 뛰었다.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 54종. [사진 bar kitchen]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 54종. [사진 bar kitchen]

위스키 빙하기가 낳은 작품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는 위스키 업계의 불황이 낳은 작품이다. 벤처 위스키의 사장 아쿠토 이치로 씨의 아버지는 하뉴증류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본의 버블 붕괴 등의 여파로 위스키 시장이 불황에 빠졌다. 팔리지 않는 위스키는 증류소에서 겨울잠을 잤고, 경영이 어려지자 2000년에 증류소가 폐쇄됐다.

하지만 아쿠토 이치로 씨는 하뉴증류소에서 만들어진 위스키가 언젠가는 분명 빛을 볼 것이라 생각해, 전국을 돌며 오크통을 보관해줄 회사를 찾아다녔다. 결국 한 회사가 요청을 받아들였고, 2004년에 벤처 위스키를 만든 아쿠토 이치로 씨는 2005년부터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를 상품화했다.

2005년 처음 발매된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 4종. [사진 bar kitchen]

2005년 처음 발매된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 4종. [사진 bar kitchen]

오래 잠든 위스키는 그 자체로 최고의 맛을 냈다. 그 맛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카드시리즈는 위스키 원액에 물을 타지 않고, 색도 안 입히고, 여과도 하지 않았다. 보다 강렬한 맛과 향을 좇는 위스키 마니아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특히, 단 한 잔이라도 특별한 맛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바텐더에게 좋은 위스키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 팔린 건 아니다. 생소한 위스키를 선뜻 구입하려는 바는 많지 않았다. 일본 후쿠오카에는 이 위스키 세트를 모두 가지고 있던 바가 있는데, 그곳의 바텐더는 우연히 찾은 홈페이지에서 ‘뭔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위스키를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렇게 유명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하지만 카드시리즈가 점점 인기가 많아지자, 새로 출시되는 시리즈를 사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일본 규슈 지역에서 치치부까지 1000㎞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결국 모든 시리즈를 손에 넣었다.

후쿠오카 bar kitchen의 백 바. 제일 위에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가 놓여있다. [사진 김대영]

후쿠오카 bar kitchen의 백 바. 제일 위에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가 놓여있다. [사진 김대영]

이 바에서 몇 가지 카드 시리즈를 마셔봤다. ‘다이와 7’과 ‘하트 10’. 당시 테이스팅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오크의 맛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그 오크를 설탕으로 잘 졸여놓은 느낌”, “대단한 원숙감”, “상쾌하면서 독특한 달콤함”, “캐스크의 단 맛과 맥아의 단 맛이 잘 융합된다” 등등.

“건포도·후추·오크 등의 맛” 

또 2017년 벤처 위스키를 방문했을 때 시리즈의 마지막인 ‘조커’를 마셔봤는데, “층층이 건포도, 후추, 오크, 초콜릿, 커피 등의 맛이 얼굴을 드러낸다”라고 기록해놨다. 54개 중 마셔본 건 3개뿐이지만 위스키 빙하기가 만들어낸 좋은 질의 몰트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다.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 ‘조커’ . [사진 김대영]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 ‘조커’ . [사진 김대영]

제 돈 주고 산 위스키야 맛을 보든 구경만 하든 자유지만, 역시 위스키는 누군가 맛을 볼 때 빛을 발한다. 과연 2019년에 이치로 몰트 카드 시리즈를 사서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벤처 위스키의 아쿠토 이치로 사장은 이번 카드 시리즈의 낙찰 소식을 듣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기쁘지만, 어디까지나 마셔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 가격에 마실 사람이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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